1. 저자노트,〈사물과 침묵의 빛〉 전문
시간이 많이 흘렀다. 자라나는 딸의 모습을 찍기 위해 카메라라는 낯선 도구를 손에 잡은 지 25년,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다. 시간이 날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들판과 거리를 돌아다녔다. 유아원에서 돌아온 딸 앞에 그날 찍은 사진들을 펼쳐놓고 좋은 사진을 골라보라고 내 놓았다. 아이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단숨에 몇 장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내가 좋다고 내미는 사진에 고개를 가로젓기도 한다. 나의 사진 확인 작업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눈이 시리도록 렌즈를 들여다보았고, 다리가 붓는 줄도 모르고 온 종일 암실에 처박혀 있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카메라와의 만남은 내 욕망에 의한 무의식적 선택이 아니었을까. 바람과 같이 일어났다가 흩어져 버리는 매 순간의 생각들. 내게는 늘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생각들과 이미지들을 붙잡아 두고 싶었다.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문장들은 언어로 해결할 수 있지만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언어의 한계 바깥에 있다. 내 시선이 안겨드는 풍경들, 사물들을 감싸 안으려는 내 시선의 욕망은 긴 세월 동안 카메라와 결탁해 왔다.
풍경에 굶주리고 사로잡힌 시선은 무거운 눈꺼풀이 더 이상 견디기 힘들 때까지 바깥으로, 풍경 속으로, 사람들 사이로 나돌아 다녔다. 카메라는 내 시선의 대행자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도구가 되었고. 나는 그 도구의 동반자일 뿐이었다.
세계의 균열은 내 안의 균열이다. 내 안의 균열은 세계의 균열이다. 카메라는 세계의 균열을 드러내고 내 안의 균열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어두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산동네. 가난한 사람들은 모두 일터로 나가고 없었다. 영하 17도의 칼바람이 불고 있었고, 어린 고양이 한 마리, 투명한 겨울의 빛이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원색 페인트칠을 한 낡고 빛바랜 담벼락에는 고단한 삶 속에서도 마음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그들의 삶에의 희망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텅 비어 버린, 낯선 동네의 침입자인 나는 몇 시간동안 골목 구석구석을 조심스럽게 돌아다녔다. 바람을 막기 위해 세워둔 부서진 판때기들과 찢어진 비닐조각들 위로 오후 두시의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만한 옹색한 골목, 계단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허술한 층계를 오르내리며, 나는 삶의 냄새를 맡고 다니는 한 마리 개였다. 마치 그곳에서 잃어버린 내 어린 시절의 삶의 진실을, 자본주의의 현란한 불빛 속에서 놓쳐버린 진실의 씨앗을 찾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마들렌 과자가 프루스트에게 콩브레의 풍경을 되살아나게 했듯이 말이다.
경사진 비탈길에서 빛을 붙들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셔터를 눌러대었을까. 현기증을 느끼며 일어서니 찬바람이 휑하니 지나간다. 빛은 어디에나 비치고 있었다. 가난한 이 골목에서 햇살은 더 없이 강하고 순수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고요와 빛이 내 안에서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던 사물과 침묵의 빛이었다.
사진을 찍는 행위는 눈앞의 세계와 사물과의 마주함이다. 그가/ 그것이 내 앞에 있고, 내가 그/그것 앞에 있음을 확증한다. 그는/그것은 그 순간 나의 현존을 확증한다. 렌즈를 들여다보고 셔터를 누르는 행위는 내 손가락의 떨림을, 내 입술의 숨결을, 내 살의 떨림을 가장 선명히 느끼는 대상과의 공존이고 공명이다. 문득 어떤 대상에 이끌려 셔터를 누르는 순간 떨림의 사건이 일어난다. 우연한 마주침에 의한 존재의 전율, 현존의 확인, 그게 내 사진 행위의 전부다. 한 장의 사진이 갖는 의미는 사후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 사진행위는 렌즈를 통해 냄새 맡고 만지고 듣는 존재론적 의미를 지닌다. 고정된 이미지 그 어딘가에서 냄새가 나고, 어른거리는 빛과 리듬이 느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
2. 김진영과 박선주의 대화,〈사진과 기억사이〉 중에서 (본문 발췌)
*김진영(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대학과 아카데미 등에서 철학, 문학, 미학을 강의하고 있다.)
박선주: 명상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동안에 혼자 산책을 하다가 문득 발견한 것인데, 식물과 빗자루, 삽이 불빛 아래 함께 있는 모습이 너무나 조화롭게 느껴졌어요. 아마도 이 빗자루와 삽이 없었다면 셔터를 누르지 않았을 겁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서로 공존해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제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지요. 그 순간 셔터를 눌렀구요. 우리의 삶 주변의 하찮은 것들, 아무도 봐 주지 않는 버려진 것들에 자꾸 시선이 갑니다. 분명히 우리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 하찮은 것들에 마음이 끌립니다. 길에서 만나는 허름한 창고, 쓰레기통과 같은 소외된 것들, 필요해서 쓰이고 버려지는 것들이 어느 순간 묘하게 존재감을 갖고 다가옵니다. 그 사물들이 말을 걸어와요. ‘나 좀 바라봐 줘’ 그렇게 얼굴을 내밀죠.
사진을 찍고 나서 왜 이런 대상들이 눈에 잡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죠. 그래서 깨닫게 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어린 시절 제 주변에 있었던 것들이었어요. 생활이 어려웠던 그 시절 우리의 집 앞마당, 혹은 담벼락, 골목 어딘가에 늘려 있었던 것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거리를 걷다가 문득 이런 사물들을 보면 예전의 집과 골목들이 떠오릅니다.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장면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것이죠. 프루스트의 소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과자를 한 입 깨무는 순간, 마르셀에게 어린 시절 살던 콩브레의 정경이 한 순간에 떠오르듯이.
김진영: 프루스트는 켈트족의 전설에 대해서 말하죠.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그 사람이 영원히 죽었다고 슬퍼 하지만, 그 죽은 자들은 영혼이 되어서 세상의 곳곳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고 해요. 그리고 그 영혼들은 우리를 부르고 우리에게 ‘나 좀 봐줘’라고 늘 말을 걸고 있지만, 우린 슬픔에 잠겨 있을 뿐이죠. 하지만 어느 순간 돌연한 기억으로 우리는 영혼들의 부름을 듣고 그들과 해후한다는 거죠. 그 기억의 계기가 프루스트에게는 감각이에요. 감각은 시간성을 지니지만 동시에 시간이 가도 남는 거라고 프루스트는 말해요. 차 한 잔을 마셨을 때, 이미 예전에 마셨던 그 차 맛은 사라져 버렸지만, 예전의 그 감각과 지금의 감각이 연결이 됩니다. 게다가 감각은 홀로 존재하지 않아요. 하나의 감각이 기억되면 그와 연결된 모든 감각들 - 청각, 미각, 촉각. 시각들 전체가 따라서 끌려 나오는 거죠. 그게 바로 무의지적 기억이 총체적 기억인 까닭이죠. 중요한 건 그 감각이 다름 아닌 사소한 것들로부터 촉발된다는 것이죠. 박 선생님의 추억 작용도 다르지 않을 테구요. 그런데 제게는 어쩐지 박 선생님의 사진들이 프루스트보다는 벤야민의 알레고리 개념에 더 가까운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네요.
3.〈2월의 노트〉, 본문 최연하의 글에서 (본문발췌)
* 최연하 : 독립큐레이터
사진작가는 전일한 의식에서 대상-세계를 응시하고 경계를 지우는 작업자이다. 분할된 조각들을 모아내 매끈하게 한 장의 이미지로 옮겨오는 자이다. 이제까지 불러졌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사물을 호출하여 다르게 말하는 사람일 것이다. 사물의 무상함을 알고 있기에 영원히 기억 될 흔적으로 기입하는 자, ‘마들렌’과 ‘산딸기 오믈랫’의 맛을 표현은 못하지만 기억해 낸 자이다. 그러니 사진작가의 자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시 보이게 하는 영매의 자리 근처가 될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