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서얼庶孼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이 많은 유생들이 황소바람이 들어오는 맨 뒷자리 말석에 앉아 덜덜 떨고 있었다. 그것이 성균관의 법도라고 했다. 산은 노여움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서치序齒대로 자리 배치를 하라고 명했다. 지금 성균관 유생이 권당을 벌이려 하는 것도 그 이유에서일 터였다. “이 모든 것이 예상했던 반발이오. 겨우 이만한 저항이 있다고 해서 물러설 수는 없소.” 산은 단호했다. “하오나 저하, 성급한 개혁은 도리어 거센 반발만 불러올 수 있습니다.” 젊은 혈기로 당차게 나아가려만 하는 세손이 거친 풍랑 속에 떠 있는 배처럼 채제공은 불안하였다. “그렇지 않소, 대감. 정녕 모르시겠소? 지금 조정과 이 나라는 온통 잘못된 관행과 습속에 물들어 있소. 헌데 저들은 그것이 오래되어 바꾸기 힘들다는 말로 대안조차 찾으려 하지 않고 있소. 어쩌면 그들은 잘못된 관행과 습속을 바꿀 의지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것을 바꾸면 저들이 가진 기득권이 위태로워지니 말이오. 저들이 이리 들고 일어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조정과 나라의 안위를 운운하며 제 잇속만 챙기려 드는 것이 아니겠소? 나는 그런 구태와 잘못을 결단코 묵과하지 않을 것이오. 그대로 추진할 것이니 대감도 그리 아시오. 오늘 올라온 개혁안은 무엇이오?” --- p.105
“이제 되었소! 당장 이판은 세손에게 투서를 넣으시오!” 동궁전의 지밀상궁을 통해 이미 세손의 약점을 손아귀에 쥔 정순왕후였다. 이제는 그 약점으로 강하게 밀어붙일 때가 왔음을 정순왕후는 절감했다. “예? 투서라니요? 무슨……?” 뜬금없는 명에 최석주는 되물었다. “은언군과 은신군의 행각에 대한 투서 말이오! 그 아이는 분명 성상에게 먼저 알리지 않고 두 왕자의 행적을 조사할 것이오.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되면 당장 궐 밖으로 나가 두 왕자를 만나려 할 것이오. 그때를 놓쳐서는 아니 되오!” “알겠습니다, 마마.” 최석주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정순왕후의 명이 몰아치듯 이어졌다. “그리고 호판은 좌상 대감을 만나주어야겠소.” “우리와 뜻을 달리한 좌상입니다. 그 음흉한 영감을 어찌해서 이 일에 끌어들이십니까?” 화완옹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쫓기던 새가 도망갈 곳을 잃으면 도리어 상대를 쪼게 되어 있는 법이오. 두 왕자에 관해 세손이 캐들어 가면 좌상의 부정이 밝혀지는 것은 시간 문제. 궁지에 몰린 좌상이 세손을 실컷 쪼게 미리 손을 써두어야지요.” 앵무에게 쪼였던 손가락의 흉터를 쓰다듬으며 정순왕후는 간교한 미소를 흘렸다. --- p.154
“……전교를 내리노라. 과인은…… 세손에게…….” 벌떡! 불기둥처럼 솟구친 정적들은 전교를 받아 적는 승정원 승지를 향해 몇 걸음 몰려들었다. “막아라…….” 영조가 명했다. 척! 처소에 빽빽하게 서 있던 상군과 협련군의 창칼이 정적들을 향해 동시에 겨누어졌다. 혜빈과 홍봉한은 소리 없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과인은 세손에게 전위를 명하노라.” 영조의 힘겨운 전교가 승지의 붓에 의해 문서로 남겨졌다. 승지가 붓을 내려놓고 유지를 들고 와 영조에게 보였다. 영조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침상 머리맡에 간직하던 어보御寶를 가져오게 했다. 꾸욱……. 붉은 인주가 묻은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유지에 선명하게 찍혔다. 드디어 산이 영조를 이어 어좌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끄응! 낯짝이 처참하게 구겨진 정적들은 탄식 섞인 숨을 토했다. “아아……!” 산을 제외한 측근들의 얼굴은 환해졌다. 하지만 산은 슬픈 눈길로 헐떡거리는 영조를 보았다. 의식이 들기 전보다 급격히 창백해진 할아비는 앉아있는 것조차 힘에 부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손자의 애처롭고 서글픈 표정을 잠시 응시하던 영조는 마지막 기운을 끌어올렸다. “……세손만 남고 모두들 물러가라. 순군과 협련군은 침소 밖으로 나가 아무도 들이지 말라.” 왕위를 잇게 된 산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영조의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보호하고자 하는 성의였다. 이윽고 영조와 산이 남았다. “아아…….”
<이산>은 정조의 일대기를 담은 작품이다. 500년 조선 왕조사에서 가장 파란만장하고 굴곡진 삶을 살았던 제22대 임금. 드라마를 해오는 동안 내가 늘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다. 이번에 그 꿈이 이루어진다. 드라마 <이산>에서 나는 정조대왕을 새롭게 조명해 보고자 한다. 끊임없는 당파 싸움 속에서 죽을 때까지 서바이벌 게임을 한 극적인 사람, 뛰어난 통치력과 포용력으로 수백 년 이어온 파당 정치를 해소한 사람, 실물 경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18세기 조선 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룩한 천재 군주, 부국강병책을 뒷받침한 명재상과 실학파 인재들을 보듬은 성군, 글씨,그림,과학기술,무예 등에 뛰어난 만능인……. 그런가 하면 천민 출신 의빈 성씨와의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를 남긴 한 인간으로서의 정조대왕! 이것만으로도 저절로 훌륭한 드라마 한 편이 탄생하게 돼 있다고 나는 자신해 왔고, 또한 지금도 그러하다. ‘동화처럼 아름답고 무협지처럼 흥미진진’하리라는 기대는, 이처럼 인간 이산의 삶에 근거하기에 가장 먼저 나를 매료시켰다. 이병훈 (드라마 이산 감독)
소설로 먼저 만나본 <이산>은 기대를 뛰어넘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그동안 내가 써온 드라마 <주몽> <허준> <상도>가 텔레비전에서 시청자를 만났듯 이번에는 역할을 바꾸어 내가 독자의 입장이 되어 소설로 먼저 <이산>을 읽었다. 드라마를 쓰고 보는 동안에는 몰랐던 재미를 소설 <이산> 속에서 발견한 체험은 신선했다. 소설가의 필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어서도 그렇거니와 애초부터 기대를 모았던 이산의 드라마틱한 삶이 제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소설 <이산>이 특히 재미있는 까닭은, 드라마와는 다른 소설 고유의 영역에 있다. 구태여 그것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드라마를 사랑하는 많은 시청자들에게 소설 <이산>이 ‘드라마에서 미처 담지 못했던 풍부한 이야기들로 색다른 재미’를 줄 것이라는 확신만큼은 말해둘 수 있다. 최완규 (드라마 주몽, 상도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