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호흡을 가눈 영조는 초헌례를 하기 위해 용작을 집어들었다. 용이 자루의 끝에 조각된 용작은 자루를 들고 작爵에 부으면 용두에 있는 용구龍口에서 울창이라는 술이 흘러나오게 되어 있는 제례용 긴 국자였다. 휘이익! 어느 찰나였을까. 용작을 든 영조의 옥수를 바람 한 줄기가 때리고 지나갔다. 그 순간, 겨울 제사에 쓰이는 잔인 황이黃彛로 향하던 용작이 후들거리는가 싶더니 울창이 잔 밖으로 비켜 부어졌다. “전하……!” 산의 심장이 다시금 바닥을 쳤다. 산은 황급히 몇 발짝 나아갔다. 능에 도착하기 전보다 왕은 눈에 띄게 힘들어보였다. “괜찮다…….” 영조는 힘겹게 손을 들어 산을 제지했다. 눈만 감으면 오래 전에 죽은 시체처럼 여겨질 정도로 핏기 하나 없는 용안이었다. 그 용안에서 식은땀이 빗물처럼 줄줄 흘렀다. 차마 재차 만류의 말을 건네지 못하고 마지못해 물러나는 산의 심장이 누군가 꽉 움켜쥔 것처럼 답답했다. 축축하게 땀이 번진 영조의 면복 겨드랑이와 후들후들 떨고 있는 옥수를 바라보는 산의 눈동자가 영조의 옥수처럼 불안하게 흔들렸다. “하아…… 하아……. 걱정 마라……. 계속할 수…… 있다…….” 영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술잔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때였다. 쨍그랑! 미끄러지듯 옥수에서 떨어진 술잔이 바닥에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영조가 썩은 고목처럼 푹 쓰러졌다. “전하!” 무덤 속처럼 고요하던 신전에 신하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할바마마!!” 하얗게 질린 산은 번개처럼 빠르게 달려가 쓰러진 영조를 안았다. 순간 산의 얼굴이 백짓장보다도 창백하게 변했다. 영조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어, 어의……! 어의는 어디 있느냐?”--- p.106
“저하…….” 송연은 가만히 산을 불렀다. 그러나 연일 지샌 날들로 피곤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산의 눈꺼풀은 열릴 줄 몰랐다. “…….” 송연은 다시 산을 부를 엄두를 못낸 채 얼마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잠결에도 한기를 느끼는지 잔뜩 어깨를 옹송그리던 산이 양손으로 팔뚝을 문질렀다. 눈에 띄게 꺼칠해진 모습으로 추위를 타는 산이 송연은 가슴 저리게 안쓰러웠다. 개유와의 방구들은 서빙고의 얼음처럼 차가웠다. 세손이 있어 서고임에도 불을 넣기야 하겠지만, 밤새 식은 구들이 덥혀지는 데는 시간이 걸릴 터였다. “저하, 이런 것밖에 없어 송구해요…….” 무릎걸음으로 산에게 간 송연은 앞가리개를 풀어 그의 지친 어깨와 가슴에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그 손길에도 산은 몸을 살짝 뒤척였을 뿐 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산에게서 송연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참으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파리한 안색조차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가인이었다. 어느 곳 하나 버릴 데 없이 소중한 가인을 송연은 빨아들일 듯 보았다. 그의 눈, 코, 입, 긴 손가락까지 송연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눈에 담고 싶었다. 내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보면 볼수록 탐이 나는 정인이었고, 그 정인에게로 향하는 절절한 연정을 가눌 수가 없었다. 연모의 애달픈 감정이 일렁이는 송연의 시선이 앞가리개 밖으로 뻗어 있는 산의 손가락에 가 닿았다. 한 번만이라도 저 손을 잡아볼 수 있다면……. 동무로서가 아니라 정인으로 그리 할 수 있다면……. 송연의 떨리는 손이 저도 모르게 산의 손가락을 향해 뻗어나갔다. 흡사 만지면 부서지는 모래인형이라도 되는 듯 송연은 산의 손가락에 살짝 제 손을 대었다가 급히 떼었다. 찰나의 마찰이었는데도 송연의 온 신경이 파다닥 일어서며 찌릿한 전기가 통했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아아…….” 송연은 터져버릴 것만 같은 심장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신음을 쏟았다. 이러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욕심이 솟구쳤다. 이 사람의 저 오뚝한 콧날, 부드러운 입술과 미려한 뺨도 만져보고 싶었다. 더는 안 된다. 함부로 이 못된 손을 대었다가 저하가 깨기라도 하면 그땐 어쩌려고…… 저하께 내 마음을 들키는 날에는……. 송연은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그러나……. 이런 날이 또 언제 올지 몰랐다. 이렇게 산과 단둘이 할 수 있는 시간이 어쩌면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꼭 한 번만이야……. 송연은 침을 꼴깍 삼키며 산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때였다. 산이 눈을 번쩍 떴다. “!!” 찰나, 두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한 채 닿을 듯 가까운 서로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멈춘 듯했고, 심장도 멎은 것만 같았다. 낯선 어색함과 부끄러움, 커다란 충격이 흰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해일처럼 두 사람을 덮쳤다. 이것은 무엇인가……. 방금 전에 내가 보았던 이 아이의 애절하면서도 그윽한 눈빛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산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송연을 보았다. --- p.154
“보상해주시오! 나라에서 준다 하지 않았소!” “비켜! 난 이 돈 못 받으면 거리로 나앉아야 한단 말이야!” “퉤엣! 이 우라질 놈의 세상! 순진하게 그 말을 믿은 내가 미친놈이지.” 손해를 본 시전 상인들은 굳게 닫힌 호조의 문을 쾅쾅 두드려댔다. “준다 하지 않소! 이렇게 떼거리로 달려들면 어쩌자는 게요?” “그 말을 어찌 믿으라고? 이번엔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나랏밥 먹는 놈들 말은 안 믿을 게요! 여기 그놈이 써준 어음이오! 이대로 돈만 갚아주면 더 있으래도 있을 생각 없으니 썩 내어주시오!” 들어간다 아우성을 치는 장사치들과 막아서는 관원의 몸싸움이 치열했다. 그 난장판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호조의 소란을 듣고 직접 확인하러 발길을 한 화완옹주와 정후겸이었다. “주상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구나, 호호호…….” 가마 안에 앉은 화완옹주의 붉은 입술이 흐뭇하게 벌어졌다. 예상한 일이라는 듯 정후겸은 별로 놀라지 않는 기색이었다. “다른 시전 상인들은 어찌하고 있다더냐?” “거래할 물목이 없다며 문을 닫아걸고 있답니다, 어머니.” 화완옹주의 가마 옆을 지키고 선 채 빙글빙글 웃던 정후겸이 말했다. “우리 세손께서 이번엔 단단히 곤욕을 치르겠구나……. 호호호…… 호호호……!” 화완옹주의 웃음소리가 가마 천장에 부딪쳤다가 열어놓은 창밖으로 튕겨나갔다. 여전히 호조 앞에서 애달캐달 악증을 떠는 상인들을 정후겸은 서늘한 눈으로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직 좋아하시기는 이르십니다, 어머니! 진짜배기는 지금부터이지요."
<이산>은 정조의 일대기를 담은 작품이다. 500년 조선 왕조사에서 가장 파란만장하고 굴곡진 삶을 살았던 제22대 임금. 드라마를 해오는 동안 내가 늘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다. 이번에 그 꿈이 이루어진다. 드라마 <이산>에서 나는 정조대왕을 새롭게 조명해 보고자 한다. 끊임없는 당파 싸움 속에서 죽을 때까지 서바이벌 게임을 한 극적인 사람, 뛰어난 통치력과 포용력으로 수백 년 이어온 파당 정치를 해소한 사람, 실물 경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18세기 조선 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룩한 천재 군주, 부국강병책을 뒷받침한 명재상과 실학파 인재들을 보듬은 성군, 글씨,그림,과학기술,무예 등에 뛰어난 만능인……. 그런가 하면 천민 출신 의빈 성씨와의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를 남긴 한 인간으로서의 정조대왕! 이것만으로도 저절로 훌륭한 드라마 한 편이 탄생하게 돼 있다고 나는 자신해 왔고, 또한 지금도 그러하다. ‘동화처럼 아름답고 무협지처럼 흥미진진’하리라는 기대는, 이처럼 인간 이산의 삶에 근거하기에 가장 먼저 나를 매료시켰다. 이병훈 (드라마 이산 감독)
소설로 먼저 만나본 <이산>은 기대를 뛰어넘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그동안 내가 써온 드라마 <주몽> <허준> <상도>가 텔레비전에서 시청자를 만났듯 이번에는 역할을 바꾸어 내가 독자의 입장이 되어 소설로 먼저 <이산>을 읽었다. 드라마를 쓰고 보는 동안에는 몰랐던 재미를 소설 <이산> 속에서 발견한 체험은 신선했다. 소설가의 필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어서도 그렇거니와 애초부터 기대를 모았던 이산의 드라마틱한 삶이 제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소설 <이산>이 특히 재미있는 까닭은, 드라마와는 다른 소설 고유의 영역에 있다. 구태여 그것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드라마를 사랑하는 많은 시청자들에게 소설 <이산>이 ‘드라마에서 미처 담지 못했던 풍부한 이야기들로 색다른 재미’를 줄 것이라는 확신만큼은 말해둘 수 있다. 최완규 (드라마 주몽, 상도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