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의 마음이란 이렇구나.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배우자를 위해 요리하고, 청소하고, 밤늦게까지 상대를 기다린다. 서운한 일이 있더라도, 정성 들여 만든 요리를 맛있다고 말해주는 상대를 보니 마음이 자연스레 풀리는구나. 배우자는 고생하며 일을 하고, 나는 그런 배우자를 보필하며 고생스러운 집안일을 하고 있다. 건강한 가정을 위한 꽤나 합리적인 역할 분담이다.
--- p.8
우리는 자주 싸우지만, 감정의 골이 하루를 넘지 않는다. 아내가 쿨한 성격이라 잠 한숨 자고 일어나면 포맷이 된 듯 다시 애교를 부린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런 다툼이 마냥 싫지는 않다. 그녀를 더 깊이 이해하는 과정이자, 자신을 알아가는 성숙의 시간이다. 이제야 결혼의 참맛을 느낀다. 서로 다른 두 우주가 만나 하나가 되었는데, 어찌 균열과 폭발이 없겠는가. 싸우면 싸울수록 그녀가 더 사랑스럽고, 그녀를 알아가는 매 순간이 행복하다.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혼 위기의 부부는 예외 없이 상대방을 너무 잘 안다고 주장하는 반면, 화목한 부부는 서로 잘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상대를 이해하고자 노력한다고.
--- pp.19-20
굳이 따지자면 나는 ‘대한민국 국적의 30대 유부남 주부’다. (가끔 중국인이라 오해하는 이들이 있지만, 토종 한국인이 맞다) 이 사회에서는 아직 남편 주부라는 개념이 희박한 관계로 이에 대한 연구가 절실한 상황이다. 그래서 시대적·사회적 사명을 띠고 본 연구를 진행한다.
--- p.60
그러나 옹졸한 면과 동시에 약삭빠르고 기민한 구석도 있다. 그래서 좀스러움을 곧잘 대범함으로 포장하곤 한다. 찜찜해도 겉으로는 아내의 구매 의사를 적극적으로 응원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기도 한다. “우와, 바지 예쁘네- 잘 어울리겠다. 얼른 주문해요. 근데 내 운동화가 좀 낡았네….” 이처럼 얼렁뚱땅 내 물건을 끼워 넣는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는 이런 ‘좀팽이 포장·은폐’ 전략은 다분히 유용하다. 특히나 배우자가 연예인에게 빠졌을 때면 더욱더 그렇다.
--- pp.74-75
‘하늘이 내린 금기 가운데 하나가 부부간 운전 교습’이라는 말이 있는데,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학원 가서 제 돈 주고 제대로 운전 연수를 받으라’는 말도 떠오른다. 이건 동의하기 힘들다. 학원은 제대로 된 운전을 가르치기보다 그저 주행 보조만 해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작 필요한 운전의 본질과 원리, 그리고 안전에 대한 기본과 철학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초보운전자의 불안감을 이용하여 장사할 뿐. 즉 하늘의 금기를 거스르고 남편이 아내의 운전 연습을 시켜줄 수밖에 없는 불편한 운명이다.
--- p.146
뜨겁게 사랑하고 있으나 도저히 상대를 이해할 수 없는 연인, 혹은 사랑보다는 끈끈한 정이 우선이 되어버린 부부가 있다면, 본인들만의 ‘거시기 애정 표현’을 정해보는 것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낯간지러워 몸이 배배 꼬여도, 눈 딱 감고 상대방의 그 표현을 그냥 받아들여보는 것은 어떨지. 둘만 아는 ‘거시기 표현’이 있다면 부부간의 어떤 일도 훌훌 털어낼 수 있다. 그 말에는, 그 언어에는, 그리고 그 마음에는 당신을 향한 상대방의 애정과 진심, 그리고 사랑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세상 그 누구보다 그대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p.201
어느 소설에서 ‘투명한 시간’이란 표현을 본 적이 있다. 언제였는지, 어느 작품이었는지, 어떤 맥락에 쓰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느 날 불현듯 이 표현이 떠올랐다. 어쩌면 아내와 함께하는 지금이 내게는 투명한 시간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혼자만 간직하고자, 탁한 시간을 억지로 부여잡던 시기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누구에게도 내 삶을 귀띔하고 싶지 않았고, 남이 개입하지 못할 나만의 시간에 집착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내와 삶을 폭넓게 공유하며, 시간 역시 맑게 나누고 있다.
--- p.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