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빨리 다마스에 올라타 문을 잠갔다. 브레이크 페달을 밟고 변속기를 드라이브로 옮겼다. 가속페달을 밟자 폭발할 것처럼 다마스의 엔진이 요동을 쳤다. 다마스가 앞으로 미끄러졌다. 그런 일련의 동작들은 내가 생각해도 번개같이 빨랐다. 젠장! 택시기사였던 아버지의 덕을 이런 식으로 볼 줄 몰랐다. 정대의 시뻘건 얼굴이 운전석 옆 유리창에 잠깐 붙었다 떨어졌다. 정대는 안간힘을 다해 쫓아오며 마지막으로 유리창을 때렸다. 그 섬뜩한 주먹질도 시원하게 뿌리쳤다. “자, 가자!” ‘드디어 끝났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눈에서 눈물이 솟더니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눈물 한 줄기가 볼을 타고 내려와 찢기고 부어오른 입술에 맺혔다.
장난치냐? 그만한 부모, 그만한 배경, 그만한 능력에……. 앞길을 고속도로로 뻥 뚫어놓고. “네 자신한테 냉정하게 물어봐라. 17년 동안 네가 한 일이 뭐냐고. 정말 어떤 일에 죽을 만큼 버르적거린 적 있었느냐고.” 웃기지 마라. 놈들에게 시달림을 받을 때, 늙고 힘없는 엄마를 볼 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볼 때,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어볼 내가 아무 곳에도 없었다. “풋!” 말 같지 않아 헛웃음이 입꼬리를 들추며 삐져나왔다.
“돌콩이 어때서?” 고아영이 피식 웃었다. 앞에 ‘돌’자가 들어가면 없어 보이고 시시해 보였다. 돌콩이 어떤 콩인지 몰라도 분명히 돌배나 돌감처럼 먹을 것이 없는 콩일 것이다. 즉석에서 갖다 붙인 별명이라지만 기분이 상당히 나빴다. “작다고 얕보지 마라. 내 안에도 천지의 모든 기운이 들어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녀린 줄기라고 안타까워하지도 말아라. 한번 잡으면 내 몸이 끊어지기까지 놓지 않는다. 너희는 언제 이렇게 목숨 걸고 무언가를 잡아본 적이 있는가? 이렇게 단단하게 익어본 적이 있는가?” 고아영이 두 눈을 살그머니 감고 낭송을 했다. 의외의 모습이었다. 돌콩에 대한 시다. 가슴이 찡했다. 돌콩이 그런 콩이라면 별명치고는 괜찮았다.
지는 해의 햇살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출입문은 커다란 빛 구멍이었다. 녀석이 나를 등에 태운 채 천천히 빛 구멍을 향해 걸었다. 눈이 부셨다. “또각또각또각또각.” 녀석의 발굽 소리가 축사 안에 울려 퍼졌다. 발굽 소리에 맞춰 나의 심장이 뛰었다. 참으로 조화롭고 안정된 박자였다. 출입문, 아니 빛 구멍을 통과하는 순간 녀석도 나도 한꺼번에 타버릴 것 같은 생각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출입문을 넘을 때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도망치고 싶어도 못 도망쳐. 이렇게 주저앉으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금주의 말로는 절망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녀석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아 녀석의 볼을 자꾸만 쓰다듬었다. 녀석이 힘겹게 눈을 떠서 나와 눈을 맞췄다. “기운 좀 내보자. 응? 너 이런 애 아니었잖아. 흑흑흑!” 녀석의 눈가에 흐른 눈물을 닦아주었다. “만지지 마. 구제역은 전염성이 강해. 그러다 다른 소까지 걸릴 수 있어. 네가 구제역의 매개가 되는 거라고.” 참 인정도 없다. 한달음에 달려온 것도 녀석으로부터 나를 떼어놓으려고 그랬던 것이다. 금주가 무릎으로 자꾸 내 몸을 밀었다. “다른 소들은 괜찮은지 모르겠다.”
“휘히힝!” 그때였다. 갑자기 마방 쪽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말 한 마리가 마방을 뛰쳐나와 내달렸다. “호르룩, 호르룩! 비켜! 비켜서!” 조교들이 소리를 치며 쫓아왔다. 거리상으로 마방에서 뛰쳐나온 말과 가장 가까웠다. 차디찬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머릿짓을 하더니 몸을 90도로 틀었다. 고삐를 쥔 손이 확 끌려갔다. “돌콩! 고삐를 놔. 어섯!” 고아영이 외쳤다. 그러나 고삐를 놓을 수 없었다. 무심코 손등 위로 고삐를 한 바퀴 돌린 것이 문제였다. 몸이 차디찬의 엉덩이 근처로 밀려났다. 뒷발차기를 한다면 영락없이 옆구리가 걸릴 수 있는 위치였다. 피한다고 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차디찬이 흥분을 하며 겅중거렸다. “다닥! 다닥! 다닥!
“돌콩이니까 잘 할 거야.” 고아영은 나보다 돌콩을 더 믿었다. 고아영과 나는 서로 고삐를 교환했다. 이미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아영의 말대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고 돌콩의 고삐를 틀어쥐었다. 그와 동시에 발을 올려 재빨리 돌콩의 등에 올라탔다. 돌콩의 등이 불쑥 올라와 있었다. 엉덩이를 구르자 돌콩의 등이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좋았어!” 고아영이 뒷걸음질을 치는 갈빛을 순식간에 제압하여 나란히 섰다. 마치 발주대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엄마, 나 공일인데, 지금 제주도 간다? 드디어 말을 타고 경주를 하는 거야. 말 타는 것 진짜 좋다? 말을 타고 달리면 말이지…….” 말을 멈춘 것은 울음이 나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엄마가 자꾸 끼어들어 참견을 하는 바람에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잠시 잊어버려서였다. “도민이도 같이 가 준다고 해서 기분 좋다? 그런데 왜 칠칠맞게, 전봇대 밑에 단추를 떨어뜨리고 그래. 단추 여기다 놓았으니 이따 퇴근하다가 찾아가. 옷에 꼭 달아. 그리고 돈 많이 벌면 엄마도 제주도로 이사 가자. 엄마도 말 타면 기분이 좋을걸?” 말을 하면서 몇 번이나 말 속에 아버지라는 단어를 집어넣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도저히 집어넣을 수가 없었다.
작가로서의 경력이 열일곱 살이 되었다. 17이라는 숫자를 인식한 순간 나는 청소년소설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것은 반란이었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 되짚어보니 나의 청소년기는 고인 물이었다. 순종이었고 복종이었다. 유난히 작은 체구와 허약함에 눌려 숨조차 크게 못 쉬고 보낸 고요의 시기였다. 내외적으로 핍박의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당시의 아름다운 일들은 떠오르지 않았고 아득한 기억 너머 작고 초라한 소년 하나가 안타깝게 웅크리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그렇다면 제대로 그 나이를 다시 한 번 살아보자는 오기가 생겼다. (작가의 말)
공일은 학교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정대의 머리통에 플라스틱 화분을 날리고, 옆에 세워진 다마스 끌고 무작정 도망친다. 그리고 목장을 하는 형에게로 무작정 달린다. 친구 금주와 형은 공일이 차를 훔친 것에 깜짝 놀라지만, 차의 주인과 합의하고 공일을 구한다. 공일은 아예 학교를 자퇴하고 당분간 형을 도우며 머물기로 마음먹는다. 두 살이나 많은 조카인 도민은 공일에게 그동안 무슨 일에 죽을 만큼 매달려본 적이 있냐고 핀잔을 주며 자신이 만든 채찍을 선물로 준다.
어느 날 채찍을 든 모습에 기수로 오해 받은 공일은 기수라는 직업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마침 기수후보생을 모집하는 신문기사를 보고 기수교육원에 지원한다. 1년 제주마 과정에 합격한 공일은 같은 길을 가게 된 승마부의 고아영에게 호감을 품고, 기수교육원에서 교육을 받으며 조금씩 가까워지며 자신들의 꿈에도 한걸음씩 다가서게 된다. 한편 공일과 특별한 교감을 나누던 형 목장의 자폐소 우공일은 독특한 행동과 가출 등을 감행하며 우여곡절을 겪던 끝에 결국 구제역에 걸려 이별할 운명에 놓이는데…….
소설 속에는 많은 사물들이 등장해 주인공 오공일을 대변한다. ‘다마스’ ‘돌콩’ ‘조랑말’ 등이 그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세상의 작은 것들을 수시로 불러들인다. 작은 것이 곧 미숙으로 치부되는 세태에서 주인공 오공일을 비롯한 작은 것들을 완숙으로 인정하려는 작가의 노력. 그러한 노력은 소설을 통해 청소년기 자체를 하나의 완성품으로 바꿔놓는다. 오공일은 기수라는 독특한 진로를 선택하고 완성을 향해 마음껏 내달린다. 이 소설은 이미 수십 편의 동화를 통해 동심 그 자체를 하나의 완성으로 인정해왔던 홍종의 작가의 또 다른 완성품이다. 박현숙 (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