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윤치호는 1928년 19세에 목포항에서 선교사와 노방전도를 하면서 다리 밑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는 고아들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생활을 하며 사회복지 공생원의 역사를 시작한 일명 ‘거지대장’ 전도사였다.
6.25때 아이들을 먹여야 할 식량이 바닥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앉아서 굶을 수는 없는 일이라며 광주로 식량을 구하러 떠나셨다가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어머니(한국명 ‘윤학자’, 일본명 ‘다우치 치즈코’)는 7세에 조선총독부 목포시 관리로 부임한 외할아버지를 따라와 목포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고등학교 은사인 다카오 선생의 추천으로 공생원에서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게 된 것인데 그 곳에서 운명의 윤치호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할 당시에는 주변의 걱정과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말씀 그대로 실천하시는 분이었다. 유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도 높은 사랑, 겸손한 사랑, 어머니를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결코 과한 것이 아니다. 목포 고향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고치에 ‘사랑의 어머니, 윤학자’의 기념비를 세울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내가 3살이던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이 해방되어 일본 여성인 어머니의 안위를 고려하여 어머니의 고향인 일본 (시코쿠) 고치로 갔다가, 그 곳에서 계속되는 설사와 열로 먹지도 못하는 탈진상태가 되어 불과 2년 만에 다시 목포로 돌아왔다.
고향서 자라는 동안 나는 내 운명을 다시 한 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는 바다와 산, 그리고 아이들이 나를 가두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갇혀버린 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자유인이었다. 지금까지 이 생각은 변함이 없다, 나는 내 운명에 감사한다.
--- 「운명」 중에서
윤태산(대언공파 32대손), 이 이름은 파평 윤씨 족보에 올라 있는 내 이름이다. 윤기, 이 이름은 아버지가 하나님에게 바치신다며 기독교의 ‘기’자를 따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다우치 모도이, 이것은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하시면서 어머니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어머니가 무남독녀이기 때문에) 일본 호적에 올린 이름이다. ‘윤’이 다우치가 되었고 국적과 호적이 일본인으로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버지의 교향이자 윤태산이라는 이름을 나에게 준 윤씨 가문들이 모여 살고 있는 (함평군 대동면) 상옥리가 나의 고향이요, 나를 키워주고 사랑해 준 목포도 나의 고향이다. 또한 언제나 나를 반겨주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고치도 나의 고향인 것이다.
--- 「이름도 셋, 고향도 셋」 중에서
목포역은 1914년 개통된 목포--- 「 「서울간의 종착역이자 시발역이고, 국도 1호인 목포--- 「 「신의주 간 939km의 시발점이여 기착점이다. 일찍부터 서구문화가 일본을 통해 들어오면서 목포는 신문화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1995년 나는 어머니를 소재로 목포 사람들의 인정과 시민정신,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과 아름다운 자연을 소개하는 영화를 제작했다. 그것이 ‘사랑의 묵시록’ 이라는 한일합작 영화였다. ‘사랑의 묵시록’은 아름다운 목포의 풍경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과 감동을 주었다.
어찌 고향을 잊을 수 있겠는가? 내 어린 시절의 추억과 꿈과 인생의 목표를 심어준 곳이며 일본 여성이었던 어머니를 최초의 시민장으로 명복을 빌어준 곳이 목포였다. 목포라는 말만 들어도 따스함과 관심에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목포는 나에게 국적보다 인간이 우선한다는 시민정신을 심어주었다.
--- 「시작의 땅」 중에서
모든 공생원의 크리스마스는 실로 대단했다. 오케스트라 연주와 합창, 연극과 기악, 성악, 무용 등 모든 예술이 등장하는데 그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 모든 일련의 프로그램들은 아이들끼리 기획하고 연출하며 준비했던,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큰 문화행사였다.
그야말로 공생원은 희로애락이 계속되는 인간사의 축소판이다. 항상 정신없이 바쁜 생활을 하다 보니, 모든 것을 준비해야 하는 나는 1년이 3개월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 나는 그들의 진실한 마음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우리가 아무리 헌신하여 봉사를 한다고 하지만, 가슴 속 가득 폼고 있는 저들의 꿈들을 어떻게 만져줄 것인가?
새 것이 없는 공생원.
남는 것이 없는 공생원.
부모가 없는 공생원.
하지만 공생원에는 사랑의 나무들이 가득하다, 특히 감사의 나무들이.
그래서 내 마음은 찬 바람 속에서도 더욱 따뜻하다.
--- 「아이들의 오케스트라」 중에서
오사카 ‘고향의 집’ 준공 후, 일본 정부 후생성에서 나를 사회복지형태 검토의 위원으로 위촉하여, 나는 한국복지의 일본실천계획이라는 정책제안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 그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국에 있는 재일 코리안 단체에 교육, 문화전문가 파견 요청
둘째, 외국인 종합서비스센터 운영 요청
셋째, 코리안 공동체에 정부의 복지사업 위탁 요청
복지라고 하는 것도 거창한 것이 아니다. 조그마한 것이라도 불편한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고 걱정해 주고 문제를 같이 풀어 나가는 것이다. 사회사업가는 무슨 꿈을 꾸는가가 중요하다. 꿈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인도한다. 꿈은 지금보다 내일에 희망을 준다.
‘고향의 집‘의 시작은 일본 안에 보다 많은 고향의 집을 만드는 꿈이어야 하고 재일동포들에게 안심하고 노후를 보낼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 「재일 코리안의 희망」 중에서
나는 왜 사회사업을 하고 있는가? 나의 적성에 맞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내가 사회사업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려운 사람을 돕기 보다는 내가 좋아서 한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나 자만일 수 있다. 나도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아버지 인생 40년, 어머니 인생 76년이 된다. 아버지보다 36여년을, 어머니보다는 20년을 더 살고 있다. 그래도 부모님이 남기신 업적에 비교하면 나는 아직 멀었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버지 어머니와 대화하면서 당신 같으면 이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풀겠냐고 지혜를 구한다.
부모님과의 대화, 이것은 나의 유일한 재산인 것 같다. 아버지가 지니셨던 뜨거운 열정 역시 나의 혈관 속에 고스란히 흐르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
나 같은 인생도 사회사업을 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윤기 같은 사람도 사회사업을 하는데 하고 용기를 얻어 이 땅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데 동참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참으로 기쁠 것이다. 아직 부모님 앞에 부끄러운 자식이지만 거지대장 윤치호의 자식으로 태어난 갓을 감사드린다.
--- 「사회사업과 나」 중에서
“아버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예수에 대한 믿음과 고아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짧은 생애를 마치고 떠난 사람.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그 때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가 남긴 신앙과 사랑, 공생의 정신은 그의 혼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쉬지 않고 뒤를 잇는 일을 하게 한다.
--- 「다시 오소서 영원한 청년 윤치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