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꿈을 기록한다는 것은 꿈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꿈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꿈을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꿈의 기록을 읽는 것 또한 꿈의 이해도 분석도 될 수 없다. 꿈의 기록을 읽는다는 것은 그 꿈에 참여하는 것이다. 꿈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다. 재현을 거부하는 존재를 읽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환영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그 환영의 출처를 알아낼 수는 없다. 그러니 포기하라. 포기하고 눈을 감아라. 그러면 아주 희귀하며 기이한 꿈에 잠겨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흔치 않은 즐거움을 줄 것이다. sheer pleasure. 한국어 산문 문학이 주는 최상의 엔터테인먼트. 지연과 반복과 몰입이 가져다주는 쾌락.
---발문: 꿈, 기록(소설가 김사과)
아야미는 얼어붙었다. 그녀의 두 손이 자신도 모르게 유리문 저편, 남자의 손을 향해서 올라갔다. 그들의 손이 겹쳐졌다. 당황스러운 떨림이 아야미의 심장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그녀는 매우 강렬하면서도 정체불명인 어떤 감정에 사로잡히는 자신의 육체를 느꼈다. 의지와 의식을 넘어서는 감정.
나는 감정이다, 하고 그녀 안의 무엇인가가 그녀를 대신하여 속삭이는 것이 들렸다. 나는 오직 감정이다.
무슨 일인가요, 하고 아야미는 입술을 움직여서, 하지만 목소리를 입 밖에 내지는 않으면서 말했다.
그때 갑자기 남자가 입술을 움직였다. 그리고 나직하지만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난 들어가야 한단 말이야! 왜 날 쫓아내는 거지?” 남자는 술에 취한 것 같지는 않았으나 이 순간 눈빛에 갑작스럽고도 기이한 광기가 번득였다. 아야미는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속으로는 어째서 자신이 두터운 유리문 밖, 그다지 크지 않은 남자의 속삭임을 이토록 똑똑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지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극장의 개관 시간이 지났다고 말했다. 남자가 독순술을 아는 지, 그건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똑똑하게 발음하면서, 이제 끝났어요, 끝났다구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남자는 주먹을 들어 마치 유리문을 내려칠 것처럼 크게 휘둘렀다. 그리고 여전히 거의 들리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너희를 모두 죽여버리겠어!” ---제1장, pp.34-35
부하는 시를 읽지도, 쓰지도 않았지만 가끔 그림을 그렸다. 그의 어머니는 화가였다. 아버지는 문화부에서 근무했던 공무원으로, 어머니보다 나이가 열다섯 살이나 많았으며 겉과 속이 모두 고루하고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화제가 궁한 오후, 어머니는 아이였던 그에게 냉소적으로 털어놓곤 했다. “화가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남편이 아니라 스폰서란다.”
몇 번의 이혼 위기가 있긴 했지만 부하의 부모는 그럭저럭 잘 극복하고 생의 마지막까지 함께했다. 부모와 같이 살던 시기에 그는 주로 어머니에게 막연한 연민을 느꼈지만, 지금은 집에서 그 어떤 자기 표현도 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최소한 애인이라도 갖고 있었기를 바랐다. 굳이 말하자면 아버지는 분명 권위적이었으나, 그의 권위에는 자기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아버지는 독재적이었으나 아무것도 통치하지 못했으며, 그의 독재에도 역시 자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누런 유령처럼 살다가 죽었다.---제2장, pp.97-96
“난 말이죠, 오늘 새벽 공항에서…….” 아야미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공항에서 갑자기 세계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깜짝 놀랐어요. 비일상적으로 환하게 불을 밝힌 공항 입국장 전체가, 입국장의 출입문이, 그 안에서 곧 모습을 나타낼 당신과 함께, 탁 하는 소리도 없이 눈앞에서 스윽 꺼져버렸어요. 마치 사물들이 아니라 내 눈동자가 사라져버린 듯했죠.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어둠의 허공을 더듬었어요. 하지만 눈을 깜빡이면, 어둠 속에 형체들이 있어요. 실체가 아닌 형체들이…… 그들은 때를 놓치고 느리게 달아나는 유령들 같았어요. 사물의 죽음 이후에도 지상에 남아 있게 된 영혼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점은, 그 어둠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알아보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게이트를 통과한 후에, 마치 나를 알고 있는 것처럼 똑바로 나를 향해서 걸어왔으니까요.”
“그건 정말이지 우연이었어요. 난 무작정 앞으로 걸었을 뿐이라니까요.”
“그리고 당신은 마치 나를 향해서 인사를 건네는 사람처럼, 광장 한가운데 석상의 짙은 그림자 속에 선 사람처럼, 한 손을 들어올렸지요. 그리고 가볍게 주저하면서 나를 향해 천천히 흔들었어요.”
“아야미 그건 정말이지 우연이었다니까요. 난 단지 앞이 보이지 않아 너무나 답답한 바람에 그냥 어둠을 좀 헤쳐보려고…….”
“그래서 나는 당신이, 바로 당신인 줄…… 알아차렸던 거예요.” ---제3장, pp.140-141
몸을 뒤덮을 듯 커다란 외투 차림의 왜소한 늙은 남자가 지팡이를 짚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 그들의 앞을 지나쳐 갔다. 그는 플랫폼의 군중들 중 가장 늙고 가장 추해 보였지만,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형상이었다. 땀에 젖은 그의 머리칼은 고약한 쉰 냄새를 풍기면서 이마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번득이는 안경알 뒤편의 피곤한 눈동자를 가진 그는 도축용 도끼 앞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해 있는 늙은 염소 같았다. 부옇게 불투명한 눈동자는 그의 육신의 요소 중에서 가장 많이 늙은 존재였다. 그 눈은 아직도 자신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주저하면서 쉴 새 없이 불규칙적으로 깜박거렸다. 눈꺼풀이 한 번씩 깜박일 때마다 눈동자는 빠른 속도로 더욱더 늙어갔다.
늙은 남자는 아야미의 앞을 지나치면서 입술을 실룩거리고 상한 치즈 모양으로 녹아서 흐늘거리는 눈꺼풀을 부들부들 떨었다. 마치 아야미에게 작별의 인사를 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이렇게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물론 나는 이름 없는 늙은 시인이지요. 그런 내가 당신들을 넘어 더 오래 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답니다.
---제4장, p.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