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도 시인으로서의 자각과 특질, 곧 높은 지성을 밑받침으로 한 ‘시정신’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우주 감각’이라 해도 좋고, ‘숭고한 미에 대한 인간의 열원’이라 해도 좋다. 자칫하면 모방과 정체 상태로 떨어지기 쉬운 형식성에 대해 끊임없는 자기 갱신과 탈피의 자세를 확보하는 일 또한 시인이 지녀야 할 특성이라 하겠다.
그런데 우리 한국의 동시는 거의 대부분이 이러한 참된 ‘시정신’의 산물이 아닌 것 같다. 유아들의 의식 상태를 재미있는 말재주를 부려 흉내 낸 것을 동시라 하여 온 것 같다. 반세기 전 동요의 출발이 그러했고, 그 뒤 유아들의 귀여움이 어린이와 소년들의 귀여움으로, 명랑하고 재미스러운 놀이로 바뀐 경우에도 동시인들이 아이들을 거짓 꾸며 보이는, 곧 어린애인 척하는 태도로 동시를 쓰는 상태는 다름없었다. 동요 ? 동시라면 시란 느낌이 들지 않고 뭔가 치졸스런 아이들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는 인상을 누구에게나 주는 것이 이 때문이다.
--- pp.11-12
‘아름답다’는 것은 어떤 사물에서 진실이 충만해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진실이 없이 아름다움이 있을 수 없다. 껍데기만의 사치나 호화로움이 참된 아름다움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작품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어린이문학 작가들은 어린이를 속이지 말아야 하며, 사실을 밑뿌리로 한 진실의 꽃과 열매를 창조하여 보여 주어야 한다. 진실만이 어린이를 감동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문학은 어린이에게 주는 것, 동시는 어린이의 참된 성장을 위해 쓰는 것이다.
--- p.72
동시는 먼저 시가 되어야 하고, 그 위에 다시 동시로 되어야 한다. 동시가 된다는 것은 ‘동시다운 것’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답다’는 것에서 끊임없이 탈피해야 시를 획득할 수 있다. 동시의 세계는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는 어린이의 눈과 마음으로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세계여야 할 것이지, 결코 시인의 머릿속에서 짜낸 관념이나 공상이나 심리의 장난 같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
--- p.88
어린이들이 즐겨 읽는 동화는 많은 사람들이 그 생활에서 절실히 느낄 수 있는 문제를 재미있는 얘기로 짜서 간결한 문장으로 들려주는 작품이다. 어린이들이 싫어하는 작품은 어린이의 세계에서 느낄 수 없는 어른들만의 생각이나 생활을 그린 것, 무엇을 쓰려고 한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시한 얘기, 다만 문학작품을 쓰기 위해서 썼다고 할 수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는 작품, 아이들을 장난감으로 여기고 쓴 것, 공허한 내용을 황당한 문장으로 꾸며 놓은 것, 아이들을 얕잡아 보고서 함부로 아무렇게나 써 놓은 불성실한 작품, 이런 것들이다. 아이들은 작품을 순박한 태도로 읽고 받아들인다. 아이들이 감동을 받는 작품이라면 어른도 읽을 맛이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재미있게 읽는다면 그 작품은 잘된 작품이요, 성공한 작품이라 보아야 한다. 아이들을 믿어야 하고 믿을 수밖에 없다.
--- p.404
흔히 어린이문학은 동심의 문학이라고 하지만, 이 동심이란 것을 좀 깊이 추궁해 본 일이 우리에겐 없었다. 그저 막연히 ‘아이들의 티 없이 맑은 마음’ 정도로 만족해 왔다. 그러나 어린이문학이 동심을 찾고 동심을 키우고 동심을 보여 주는 동심의 문학인 것이 사실이라면 ‘순진무구한 세계’라고만 간단히 말해 넘기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다. 동심의 정체를 꼭 어떤 형상으로 고정시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성격·자세·지향 같은 것을 문학을 창조하는 작가의 세계에서 제 나름대로 체득해 놓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
우리는 이 말의 참된 뜻을 찾아내어 밝혀야 하는 것이다. 참된 동심의 뜻을 찾아 가진다는 것은 참된 어린이문학의 세계와 그 이념을 파악하는 것일 수 있으니까.
동심은 어른들의 장난감도 아니고, 옛날을 회상할 때 잠기는 늙은이들의 그리운 세계도 아니다. 그것은 삶의 터전에서 온갖 부정과 역경과 싸우면서 끝내 지켜 나가는 순수한 인간 정신이며, 끊임없이 자라나는 선의 마음 바탕이며, 온 민족의 어린이와 어른의 마음 바다로 확대해 갈 수 있는 정심(正心)이며, 문학에서 가장 효과 있게 키워 나갈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 pp.473-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