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로 자처하기’가 사회에 만연하게 되면서 이들 희생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정의 위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이제 사람들은 가해자들에게 어떤 형별과 제재를 가할 것인가만을 화젯거리로 삼게 되었다. (…) 이제는 대단한 업적을 성취한 여성보다 ‘남성 중심 사회의 희생물인 여성’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 슈퍼우먼은 이제 비정상인으로 간주되고, 심지어는 고통받는 다른 여성들과의 공동 연대 계약을 저버린 이기적인 특권자로 간주되었다.
--- p.17
이런 식으로 통계 수치를 부풀려 가면서 여성운동을 진행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여성은 피해자, 남성은 가해자’라는 생각이 일반화되었다. 드워킨이나 매키넌처럼 극단까지 가지 않더라도 결국 여성은 점차적으로 ‘아동’과 같은 사회 신분으로까지 떨어지게 된다. (…) 영원한 미성년자인 여성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집안의 남자들을 불러대는―옛날의 가부장적 시대의―상투적인 개념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옛날과는 달리 그녀들을 보호할 남자는 이제 없다.
--- p.51~52
바로 여기에 오늘날 새로운 페미니즘의 문제가 있다. 어떻게 진부한 사상에 빠지지 않으면서 여성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할 것인가? 자유에 손상을 입히지 않고 어떻게 본질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남성/여성을 철저히 분리시켜 온 감옥을 다시 짓지 않으면서 어떻게 성의 이원론을 지지할 것인가?
--- p.56
결국 1980년대 후반의 페미니즘은 사라져 가는 여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성 차이와 모성적 특성을 제거한 민주주의’에 대항하였고, 급기야는 ‘여성 살해’를 이야기하기에 이르렀다. ‘성’과 ‘젠더’ 사이의 끔찍한 혼란이 나타날 위험성은 없었지만, 사람들은 남성적으로 정의된 유일한 젠더와 불안정한 젠더의 이원성을 두려워했다.
--- p.60
생리학적 차이를 미덕과 역할 수행의 기본 요소로 보는 이런 접근 방식은 모성애를 알지 못하는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단죄하는 것이다. 남성의 경우는 구제 방법이 없어진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 버지니아 울프가 만일 어머니였다면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며, 루 안드레아스-살로메가 신비롭게 남아있는 것은 출산을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여성 동성애자와 불임 여성, 또는 출산을 거부하는 여성들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 p.63
인종차별주의와 파시즘에 대항하듯이 남성 지배주의에 대해서도 투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선행되어야 한다. 남성 지배와 그것의 근간이 되는 폭력이 우리가 자주 듣는 것처럼 그렇게 보편화되어 있다면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구원이 올 수 있는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자처하는 남자들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그들은 착취자의 신분으로부터 그들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의 배우자에게 무엇을 제안하는가? 집단적 자각과 자각 이후의 자아비판인가? 그러나 그것이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 특히 제도들을 붕괴시킬 수 있는가? 이런 어려움은 악의 표명으로부터 온다.
--- p.66~67
아동의 문제는 곧 여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배적이고 공격적인 남자들에게 아동과 여성은 모두 순수하고도 무력한 희생자들이다. 희생자는 언제나 옳다는 생각에, ‘희생자는 악의 힘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선을 상징한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추가되었다.
--- p.73
“(…)합법적 폭력(국민방위대, 혁명재판소 등)에서 배제된 여성들이 처형장에 참여하는 것은 민중의 힘을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며, 민중의 힘을 상징적으로 함께 나누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도미니크 고디노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여성 폭력에 대해 정치적 해석을 한 것이다. 그녀는 그 당시 여성들의 잔인한 이미지에 반대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평론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는 일말의 후회를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렇다고 해서 여성들의 난폭함을 모두 지워 버리고, 지나치게 세련되고 온화한 여성의 이미지만을 보여주려는 의도는 없다. 혁명 당시 여성들은 ‘다른 사람들(남성들)과 마찬가지로’ 함성을 질렀고, 적에게 죽음을 예고했고, 죽음을 보러 가기도 했으며, 공포감을 조성했다.”
--- p.91
섹스에 별도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소위 ‘성의 구속에서 해방된 여성’들은 이런 원칙에서 예외였다. 그녀들은 남성화된 여자, 즉 정신적 문제가 있는 여자, 자칭 자유인이라고 하지만 이론의 여지없이 매춘부로서, 가장 불행한 여성으로 간주되었다. (…) 소비된 성[性]에 대한 비판에 이어, 성의 상업화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순식간에 이 페미니즘의 어투는 오래된 유대·기독교의 권선징악적 어투를 닮아갔고, 그렇게도 힘들여 없애려 했던 성에 대한 상투적 개념을 되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 p.121
마치 물건처럼 온갖 방법으로 망가뜨려지고 학대당한 육체는 몸의 몇몇 특정 부분만이 강조되면서 몸 그 자체가 가지고 있던 에로틱한 특성을 잃게 된다. 이에 대한 도미니크 폴셰드의 지적은 정확하다. “순전히 섹스의 논리만 찾을수록 기계와 같은 기능을 요구하는 섹스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럴수록 우리 육체는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며, 성관계시 전략상 중요한 부분들을 도구와 장난감으로 만들기 위해 몸은 더욱더 부위별로 나뉘고 분리되어야 한다.
--- p.135
상상력과 자발성이 허락되지 않는 성행위는 에로티시즘의 종말을 의미한다. (…) 분명히 우리 각자는 동의하지 않는 것과 반대로 성적 흥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사랑에 동의하는 것과 섹스에 동의하는 것이 종종 서로 애매하게 얽혀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확실하지 않거나 미정인 상태, ‘예’인 동시에 ‘아니오’가 공존하는 상황인 것이다. 종종 모순적이기도 한 이 복잡한 회색지대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리는 차라리 이것을 모른 척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에 관한 이론과 정책에서 무의식이라는 것은 이제 설 자리가 없다.
--- p.151~153
여성을 방어 능력이 없는 피해자인 어린이로 보는 시각과, 남녀동등성 실현의 필요에 의해 여성을 어머니로 보는 시각, 그 두 시각 사이에서 우리가 그렇게도 꿈꿔왔던 이상형인 자유로운 여성이 설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 p.182
[프랑스] 공립학교에서 [아프카니스탄 여학생들이] 머릿수건을 써도 된다고 허용하면서, 프랑스 공화국과 프랑스 민주주의는 관용정신에 대한 존경심은 증명했으나, 자국 내에서 양성평등의 요구는 확실히 포기한 셈이다. 이들은 모두가 정반대로 알아들었을, ‘여러분의 딸자식은 마음대로 하시오, 더 이상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오’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 것이기도 했다.
--- p.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