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송록』에서 다루는 민장이란 민들이 지방의 수령에게 올린 청원서나 고소장을 가리키며, 민들이 올린 소지와 그에 대해 관이 내린 판결을 간략히 기록해서 성책한 것을 민장치부책이라 하는바, 1891년 진천 지역의 민장치부책을 묶은 것이 이 『사송록』이다.
당시는 백성이 소지(所志)를 올리면 수령은 소지의 여백에 간단한 제사를 내려서 돌려주는데 그 내용에는 사건의 처리를 지시하는 관의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민이 소지의 원본을 갖게 되어 관에서는 소송의 진행, 청원의 처리 등 사태 전개를 파악하기 위해 소지와 관의 처결을 간단히 요약한 기록이 필요하였다. 민장치부책은 이런 민장의 구성요소를 간단히 요약하여 기록한 것이다.
19세기 향촌사회에서는 ‘소송의 홍수’라고 불릴 만큼 많은 송사가 나타났는데, 학계에서는 18세기 중엽 이래 조선사회에서 공동체적 관계가 사실상 동요, 해체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특히 세도정치와 삼정문란을 통해 체제위기에까지 이른 19세기 말에는 향촌 단위의 민은(民隱)과 민간의 분쟁?갈등이 한층 증폭되고 격화되었다.
진천 지역 역시 인구의 절대 다수가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쌀의 수확량이 좋아 남은 쌀을 외지로 팔고 면화를 생산하는 방식을 통해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당시 진천의 정치사상적 분위기는 기존 노론 중심의 양반 사회에 소론계 소장 양반들이 등장하면서 갈등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들 소론층들은 특히 주자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졌던 양명학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진천의 분위기가 당시 지역민 들간의 갈등과 공존 양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많았다는 점을 짐작케 한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진천 『사송록』에서 흥미로운 점은 관과 민의 부세 관계 보다 민인 간의 경제적 문제가 그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여타 다른 민장의 경우 삼정을 중심으로 한 부세문제가 다수를 차지했다는 점과는 다른 점이다. 민인의 경제적 문제가 상당한 수를 차지한다는 것은 당시 민들간의 갈등이 자신의 재산이나 토지의 사적 소유권을 배경으로 더욱 확산되고 있었다는 배경으로 할 것이다.
이 민인 간의 경제적 분쟁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점하고 있는 것은 산송(山訟)이다. 조상의 묘지에 몰래 쓴 무덤을 파내가도록 독촉해 달라는 송사, 묘역의 송추(松楸)를 몰래 베어갔다는 고발 등과 같이 묘지를 둘러싼 다양한 민원이 제기되었다. 투장에 대해서 대체로 수령은 묘주를 알 경우 즉시 파내어가도록 처결했다. 하지만 묘주를 알 수 없을 경우에는 임의로 파내지 않고 묘주를 찾아내기 위한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예컨대 투장묘 주위에 팻말을 세워 알린다던지, 무덤을 곧 파겠다는 표시로 무덤 주위에 고랑을 파는 등의 행위이다. 산송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185. 산송-투장
문방면 외굴에 사는 임중변이 정소하기를, “저의 8대조 산소가 보시동(保時洞)에 있는데, 족인(族人) 정언이 그 부모를 몰래 매장하고 파내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제사(題辭):“과연 소장에서 말한 것과 같다면, 자손된 자가 남이 와서 매장하는 것을 금지할 겨를도 없는데 도리어 스스로 매우 가까운 곳에 매장하니, 비단 족척(族戚)에만 죄를 얻을 뿐 아니라 조상에게까지 욕을 보이는 것이다. 이 어찌 사람의 아들로서 차마 할 수 있는 바의 일이겠는가? 만약 털끝 하나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는가? 이 제사를 가지고 가서 정언에게 보이고 즉시 파내어 옮기고, 오래 지체함 없이 행하는 것이 마땅할 일.”
산송에 관한 송사에서 수령은 대부분 즉각적인 시정을 명령하였지만 다음처럼 수령의 명령이 잘 지켜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121. 산송-투장
남변면 적현 정인춘(鄭寅春)이 정소하기를, “한(韓)씨 양반 용직(龍直)이 한 자가 되지 않는 땅에 몰래 매장하여 누차 패소하였는데 끝내 이장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제사(題辭):“누차 패소하였고 또 관가에서 다짐하였는데 끝내 옮기지 않았으니, 민습이 놀랍다. 일이 마땅히 엄하게 곤장을 치고 파낼 것을 독촉해할 것이다. 잠시 용서하니 즉시 파내어 가고 다시는 번거롭게 호소함이 없도록 할 일.”
또 제사 내용을 살펴보면 가부장적인 조선시대의 정서 속에서 과부나 고아에 대해 가엾게 여기고 배려하려는 움직임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외로운 과부’ 내지 ‘하물며 과부에게’라는 식의 표현으로 나타난다.
7. 종중답
이곡면 장양의 정(鄭)씨 과부(寡婦)가 정소(呈訴)하기를, “종답(宗畓) 1석락 1두락을 시당숙이 방매(放賣)하려고 하니, 관에서 금단하는 뜻의 완문(完文)을 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제사(題辭):“홀아비와 자식이 없는 사람조차도 쇠약한데 하물며 외로운 과부야 어떠하겠는가? 그 당내의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보호하도록 해야 함에도, 반대로 속여서 빼앗으려는 것이 차마 할 일인가? 이 같은 마음이 다시 생기지 못하게 하고 더욱 돌보아서 그 외로운 과부로 하여금 보호받도록 하고, 또한 그 집안이 두터워지고 화목하며 사랑하고 구휼함이 넘치게 할 것. 이를 마땅히 완문으로 내리니, 이 제사를 즉시 입지할 일.”
이처럼 진천의 『사송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조선후기 백성의 존재형태는 예속농민이 아니라 자의식을 가진 농민의 모습이었다. 글자를 모르는 민들을 위해 소장을 대리로 작성해주는 직업이 등장할 만큼 소송 내용도 급증했으며 건수도 많아졌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직전 시기의 재판으로 만나본 조선의 백성은 경제적 신분적 갈등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런 변화의 뒷면에는 사회적 변화와 관계없이 지속되는 일상의 단편적인 모습들도 보여 조선 백성들의 삶 자체를 엿보게 해 준다.
특히 조선시대 지방 수령은 한 지역 안에서 국왕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사람인만큼 그 규모는 작지만 대다수의 일을 맡아서 하고 있었다. 또 수령은 여타 관리와는 다르게 민들의 삶에 가장 가까운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수령의 능력은 그 지방통치에 직결되는 문제였고, 아전을 다루는 방법부터 백성의 요구를 부응하는 것까지 수령은 잘 처리해 나가야만 하였다. 이러한 수령의 책임감은 수령의 역할과 정신을 다루고 있는 목민서가 조선후기에 많이 간행되었고 필사된 측면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책임 있는 목민관의 역할을 요구하는 지역민들이 성장하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을 이 『사송록』을 통해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자료가 비록 조각난 단편 사실을 담고 있는 자료이기는 하지만 농민들의 의식 성장과 그들 간의 삶의 형태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할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