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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

포은 정몽주

: 포은 정몽주와 그의 후손들

[ 양장 ] 포은학술총서-04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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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4월 20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295쪽 | 568g | 160*232*20mm
ISBN13 9788968170416
ISBN10 896817041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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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포은 정몽주는 일찍이 태종 원년(1401)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는 등 왕명(王命)에 의한 복관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중종 12년(1517) 태학생 등의 상서(上書)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포은을 배향하는 서원이 각처에 건립되었다. 대표적인 것을 들어보면 명종 10년(1555) 포은의 구거지인 영천에 임고서원이 창건되어 사액되는 것을 필두로 선조 9년(1576) 용인에 충렬서원이 건립되었다.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 전개되었던 포은 정몽주의 추숭활동과 그 연결선상에서 이루어졌던 서원 건립이 지녔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특히 16세기 중후반 이후 본격화한 사림의 활동에 주목하여 시기별로 나타났던 정몽주를 향사한 서원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현재 정몽주 제향 서원에 대한 연구는 개별적인 사례연구와 함께 지역별 사족의 동향과 연계한 연구 등을 참고할 수 있다.1 이러한 선행연구를 참고하여 이 글에서는 우선 조선시대 정몽주 제향서원의 건립 추이를 시기별 지역별로 개관하여 그 전모를 제시하고, 다음으로 서원의 성격과 변화상을 당시의 정치사회적 변동상과 결부지어 살펴보았다.

2. 서원 건립의 추이

포은 정몽주의 서원 건립은 16세기에 전개되었던 사림계의 활동과 매우 관련이 깊다. 주지하다시피 서원 건립의 정치사회적 배경은 중종연간 도학정치의 실현을 추구하던 사림계의 활동에서 마련되고 있었다. 당시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기묘사류(己卯士類)들은 향약·소학의 보급 등과 문묘종사운동을 통해 그들의 교화론(敎化論)을 적극적으로 실현하려 하였다.
이러한 사림계의 활동은 당시 난맥상을 보이던 국학의 부진을 타개하고 새로운 교학체제(敎學體制)를 수립하기 위한 적극적인 시도였고 나아가 중앙 정계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명분을 굳건하게 다질 의도 하에 추진되고 있었다. 이러한 활동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정몽주·김굉필 등의 문묘종사운동(文廟從祀運動)이었다.
정몽주의 문묘종사 시도는 기묘사류가 등장하기 이전인 중종 9년(1514) 사경(司經) 김구(金絿)가 그의 이학(理學)을 들어 종사를 거론했으나 조정의 반대로 중지된 적이 있었다. 이후 중종 12년 8월 조광조와 연결된 성균생원 권전이 정몽주와 함께 김굉필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올림에 미쳐 종향론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권전 상소의 요지는 도통설(道統說)에 토대하여 동방이학(東方理學)은 정몽주에 의해 뿌리 내리고 김굉필에 의해 다시 밝아졌으므로 두 사람을 종사하기를 청하는 내용이었다.
위 양인의 문묘종사 건의는 그들의 학문적 계승자로 자처하는 조광조 일파의 출자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공신계열에 대하여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해 주는 측면이 강하였다. 특히 김굉필은 조광조의 스승이므로 그를 유현(儒賢)으로 인정하여 성균관의 문묘에 종사한다는 것은 조광조일파의 도학적 정통성을 드러내고 사림들의 지지를 받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그러니 만큼 문묘종사 문제를 놓고 공신계의 반대가 치열한 것은 당연하였다. 당시 중종은 대신에게 두 사람의 종향 여부를 의론케 하였다. 대개 정굉필, 신용개, 김전(金詮) 등의 공신계열은 정몽주의 학문적 공로는 인정하나 위신(僞辛(禑?昌王))을 섬긴 것에 흠절이 있으며, 김굉필은 사문(斯文)을 돕게 한 공이 없다고 반대하였다. 이에 대해 조광조는 “문묘종사로 인해 아래 사람들이 그 뜻과 기상에 격동하게 될 것이며 그 나아가는 방향 역시 바르게 될 것”이라 하여 그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결국 종사논의는 당시의 정치세력과 직접적인 관련이 적은 정몽주만 입향(入享)하는 것으로 종결지어졌다.
정몽주의 문묘 종사이후 사림계는 향촌사회에서 유현의 입사(立祠)를 통한 시도를 본격화하였다. 명종연간 을사사화로 정계에서 물러난 사림계는 피폐한 관학 교육에 대한 대안이자 향후 자신들의 정계 재진출을 위한 향촌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도학유현의 학문적 정신을 표방하는 서원을 건립하여 갔던 것이다.

2.1. 지역별 분포

정몽주를 제향한 서원은 서원자료의 편찬 연대에 따라 기록마다 약간씩 다르다.6 이 글에서는≪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를 기초로 하고, 다른 기록들을 참조하면서 논의를 진행하기로 하겠다. ≪증보문헌비고≫ 서원 기록7에 의하면 다음에서 보는 바처럼 정몽주를 제향한 서원은 전국에 총 13개소가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표 1〉 지역별 분포

지역별로 보면 정몽주를 제향한 서원은 다소 편중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경상도가 6개소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다음으로 함경도 3곳, 경기도 2곳 등으로 분포하고 있다.
경상도는 정몽주의 구거처(舊居處)이자 관향(貫鄕)에 일찍이 서원 건립이 이루어졌다. 이 점은 조선시대 서원이 제향인물의 출신 고을을 연고로 건립되어갔던 추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경기도는 용인과 개성 2곳에 서원을 건립하였다. 용인은 정몽주의 묘소가 위치한 곳으로 선조 9년(1576) 충렬사가 창건되어 정몽주·조광조 이현(二賢)을 함께 향사하다가 임진왜란이후 충렬서원으로 중창되어 사액을 받았다.이후 충렬서원은 정몽주의 독향지원(獨享之院)으로 존재하며 임고서원과 함께 대표성을 지닌 곳이었다. 개성은 정몽주의 충절이 깃든 지역으로 숭양서원이 창건되었다.
경상도 등지에 비해 사족(士族)의 세력이 비교적 약하다고 알려져 있는 함경도에 3곳, 평안도에 1곳의 서원이 건립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함경도의 경우 영흥(永興)의 흥현서원(興賢書院)의 창건유래는 기록이 없어 살필 수 없지만, 함흥(咸興)의 운전서원(雲田書院)의 경우 현종 8년(1667) 관찰사로 부임한 민정중(閔鼎重)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민정중은 송시열의 문인이자 산당(山黨)계열로 활동한 인물로 북로(北路)의 교화 차원에서 서원을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비슷한 시기인 현종 9년 이루어진 정평(定平)의 망덕서원(望德書院)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서 건립이 이루어졌다. 또한 평안도의 성산서원(星山書院)은 순안현(順安縣) 북령(北嶺)에 정몽주의 유적이 있음을 연고로 유생들이 서원을 건립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전라도의 경우 다른 지역보다 늦은 시기인 숙종 28년(1702) 운봉(雲峯)에 용암서원(龍巖書院)이 건립되었다. 정몽주와 함께 호남(湖南)출신으로 양난기에 창의의 기치를 높인 절의지사(節義之士) 5인을 제향하였다.

2.2. 시기별 추이

조선시대에 건립된 서원?사우 수는 총 900여 개소로 집계되고 있다. 이에 비한다면 13개소의 정몽주 제향서원의 존재는 매우 작은 셈이다. 그러나 서원에 단일 인물이 여러 군데 제향된 곳을 조사하면, 정몽주 제향 13개소는 조선 유현으로 우암 송시열 44개소, 퇴계 이황 29개소, 율곡 이이 20개소 등에는 뒤지나 다른 인물들에 비해 비교적 많이 건립된 사례로 파악할 수 있다.또한 서원의 건립이 특정 시기가 아닌 전 시기에 걸쳐 이루어지는 사실도 포은 정몽주가 지녔던 위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표 2〉에서 보듯이 정몽주를 제향하는 서원 건립의 시기는 16세기부터 17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분포하고 있다. 이중 포은 제향서원으로 최초의 건립사례는 1555년(명종 10) 경상도 영천의 임고서원이다. 이 서원은 서원 발흥기에 나타난 초기 서원을 대표하는 곳이다. 퇴계 이황은 임고서원의 운영에 자문하며 내사본≪성리군서(性理群書)≫를 전달하기도 하였다. 초기 서원 건립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도학유현의 제향을 통한 흥학지심(興學之心)의 발현처로 인식되어 많은 사림계 인물의 관심과 지원을 받았다.

〈표 2〉 건립의 시기별 분포

이후 서원의 발전기라 불리는 선조~현종 연간에는 총 9개소의 서원이 건립되었다. 이 시기 정몽주 제향 서원은 지역적으로 경상도와 함께 경기도, 전라도, 함경도 등지로 확산되어갔다. 특히 선조 초년 개성의 숭양서원(선조 6년)과 용인의 충렬서원(선조 9년)이 창건되어 경상도의 임고서원과 함께 포은 정몽주의 주요 제향처로 자리잡아갔다.
이와 함께 경상도지역에 선조연간 창건한 서원으로 연일(延日)의 오천서원(烏川書院, 선조 21년 창건, 광해군 5년 사액)이 있다. 정씨의 관향(貫鄕)인 연일에 건립한 이 서원은 시조 정습명(鄭襲明)을 비롯하여 정사도(鄭思道), 정몽주의 제향처로 널리 알려져 왔다. 건립 이후 남인계 명사인 한강(寒江) 정구(鄭逑, 1543~1620),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 그리고 강좌(江左) 권만(權萬, 1688~1749) 등이 그 운영에 관여하였다.
상주(尙州)에서는 선조 39년(1606)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검간(黔澗) 조정(趙靖)·창석(蒼石) 이준(李埈) 등의 공조하에 문묘종사 5현을 향사하는 서원을 건립하였다. 도학(道學)을 계승한 오현(五賢)이 영남에서 배출된 사실을 특기하여 ‘도남(道南)’으로 서원의 명칭을 명명하였고 이후 노수신(盧守愼), 유성룡(柳成龍), 정경세 3인을 추가로 배향하여 ‘팔선생(八先生)’을 모시는 영남의 큰 서원이 되었다.
용궁(龍宮)의 삼강서원(三江書院)은 인조 21년(1643) 이 지역에 정거하던 호우(湖憂) 이환(李煥)이 창의하여 서원을 건립하고 포은, 퇴계 양선생과 서애(西涯) 유성룡을 배향하였다.
함경도의 경우 1612년(광해군 4) 흥현서원을 필두로 현종 년간 운전서원(1667, 현종 8), 망덕서원(1668, 현종 9)이 건립되었다. 앞서 언급하였듯 현종연간 북로지역의 교화를 위해 중앙의 산당계(山黨系) 인사였던 민정중이 주도하여 서원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17세기후반에 건립된 수는 3개소로 오히려 다른 서원의 건립 빈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이다. 경상도 2곳(구강서원, 반구서원)과 전라도 1곳(용암서원)의 건립에 그칠 뿐이다. 이 중 1679년(숙종 5)에 건립한 울산의 구강서원은 갑인예송(甲寅禮訟)이후 집권한 남인정권하에 건립된 곳으로 중앙 붕당세력의 지역적 거점 확보 차원에서 건립되었다고 밝혀져 있다.

2.3. 배향인물

서원의 성격을 올바로 이해함에 있어 제향인물의 면면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건립세력과 이후 서원의 운영을 주도할 집단의 성향을 파악하려 할 때 배향인물이 누구인지가 매우 중요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래의 〈표 3〉은 정몽주 제향 서원의 배향인물을 살피기 위해 제시하였다.

〈표 3〉 제향서원의 배향인물

위의 〈표 3〉에서 보듯 정몽주 독향(獨享)의 경우는 경기도 용인의 충렬서원 1곳이다. 다음으로 배향인물이 1인인 경우는 3개소로 조광조(영흥 흥현서원), 이언적(李彦迪, 울산 구강서원), 한우신(韓禹臣, 순안 성산서원)이다. 배향인물이 2인인 경우는 3개소로 이언적·정구(鄭逑, 언양 반구서원), 이황·유성룡(용궁 삼강서원), 장현광(張顯光)·황보인(皇甫仁)(영천 임고서원)이다.
배향인물이 3인 이상인 경우는 6개소인데 우선 문묘종사(文廟從祀) 오현(五賢)을 합향한 곳으로 상주 도남서원과 함흥 운전서원을 들 수 있다. 연일의 오천서원은 정습명, 정몽주의 향사하다가 영조 16년(1740) 정사도, 정철을 배향하였다. 함경도의 망덕서원은 포은과 정암의 제향처로 내려오다가 숙종연간 노론계 인물인 김상헌(金尙憲)·조익(趙翼)·민정중을 배향하였다. 개성의 숭양서원은 정몽주의 독향처로 내려오다가 현종 9년(1668)에 서경덕(徐敬德)과 김상헌을 추배했고, 숙종 7년(1681) 김육(金堉)과 조익을, 정조 8년(1784) 우현보(禹玄寶)를 추배했다. 전라도 운봉의 용암서원(龍巖書院)은 숙종 39년(1713)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기에 충절을 드높인 박광옥(朴光玉), 변사정(邊士貞), 황일호(黃一皓) 등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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