홧 아 유 두잉? 당신을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아임 리딩 어 북. 나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홧즈 유어 프렌드 두잉? 당신의 친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석양이 오빠의 이마와 목덜미를 붉게 물들이며 방을 깊숙이 가로질렀다. 내가 기억하는 한의 그 시간은 늘 그랬다. 함석 지붕이 하를듯 뜨겁게 달아오르고 저녁 햇빛이 칼처럼 바안에 깊숙히 꽂힐 즈음이면 어머니는 화장을 시작하고 오빠는 창가에 놓인 붉은 꽃무늬 도배지 바른 궤짝 앞에 앉아 꼼짝 않고 소리 높여 영어책을 읽었다.
나는 어머니의 곁에 앉아 갖가지 화장품이 담긴 병들을 만지작 거리거라 팡을 통해서 멀찍이 보이는 개울의 다리와 신작고 그리고 더 멀리 황금빛으로 번짝이는 초등학교의 창을 점점이 붉은 빛이 묻어나는 새털구름들을 바라보며 이유가 분명치 않은 조바심으로 어머니와 오빠 사이의 은밀히 조성되어가는 팽팽한 공기를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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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 · 색깔 · 피부로 드러나는 감각적인 기호들은 하나의 대상을 또는 그 대상과는 다른 어떤 것을 지칭하면서 시간을 뒤집고 가른다. 그 갈라진 시간의 틈 때문에 물빛, 한 줄기 햇살, 기차 소리, 노란색의 냄새, 그 모든 감각적 기호들 속에도 과거와 현재라는 두 시간이 동시에 녹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서로 다른 두 성질의 기호들이 동시에 삶의 자장 속에 맞물려서 공존한다. 그리고 수없이 반복되는 '기억'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동일한 아이덴티티를 갖지 못하게 틈을 만든다.
다시 말하면 오정희는 '기억'을 통해 떠오른 과거로 현재를 재구성하여 자기 존재의 동일성을 찾아가지 앟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기억은 현재 '나'의 삶 속으로 파고들어와서 시간을 흩뜨리고 삶에 바느질 자국을 낸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오정희 소설에 존재하는 시간은 '영원한 현재'의 시간이다. 그 속에서 과거와 미래, 현재가 동시에 존재하며 과거와 미래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서로 환원할 수 없는 차이를 지닌 채 떠돌아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