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낮 해봐야 시시한 얘기, 시시한 족속들의 얘기라는 건 뻔하지. 누구네 집에 누구누구가 초대되고 누구누구는 빠지고 누구하고 누구의 눈길이 맞았고…… 대충 그런 거지. 남의 나라에 서처럼 귀부인들이 살롱을 열어 정계를 주름잡고 예술의 전당이 되고…… 그런 흉내를 내고 싶은 모양이지만 따라가 주어야 말이지. 좀 거창한 말씀을 하신다면 웅장한 코의 소유자인 시라 노 드 벨주락께서는 외사랑 하던 절세가인에게 주보들려주었다는데 사교계의 가십이라도 그 정도까지 올라가려면 아득하외다. 농사꾼 계집들한테 다이아몬드의 목걸이를 걸어준 격이지. 가랑이 찢어지게 생겼어 가랑이.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면 으흐흐…….” ---p.15
“남의 앞에서 화장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귀부인이고저 하고, 여류명사이고저 하고, 청렴결백한 인격자이고저 하는 그 화장이 너무 짙어서 회벽이 되었다면, 그건 흉물 이지 어디 미인이라 할 수 있겠어요?”
동생을 외면한 유 여사의 얼굴이 불쾌감에 일그러진다. 병삼의 눈은 더욱 잔인하게, 어쩌면 병적으로 잔인하게 빛났다.
“다방을 경영하고 영업용 택시를 굴리고, 때론 홍콩에서 온 보따리까지 취급하면서…… 뭐 조상님한테 막대한 유산이라도 물려받은 것처럼,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죠? 그러지들 마세요. 체면이 두렵고, 치사한 짓이라 생각되면 안 하는 거지, 안 하는 거요.”
“그럼, 날더러 광고하고 다니란 말이냐!”
소리를 팩 지른다.---p.21
“이제 부자들도 고상해질 시기가 오지 않았습니까?”
아차 이것은 오발이었구나 생각했을 때, 때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 부인은 완연히 불쾌한 낯빛이었고 양두연은 당황한 나머지 지금껏 마시고 반쯤 남은 커피에다 설탕을 처넣으며 범벅을 만들고 있었다.
부인은 무슨 생각을 했던지 불쾌한 낯빛을 펴고,
“그럼, 여태까지 부자들은 모두 천박했었다는 얘기가 되겠군요.”
멋쩍은 듯 웃었다. 그만해두었음 좋았을 것을,
“아아, 아닙니다. 저, 그, 그 벼락부자 말이죠. 아니 저 해방 후 탄생한, 아니 전후에 탄생한 부자들 말입니다.”
이거 나올 돈도 안 나오겠다 생각하니 병삼은 초조했던 것이다. 양두연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우린 해방 후의 부자예요. 아니 육이오 동란 후죠, 정확히는.”
부인은 피부를 바늘로 찌르듯 말했다.
“저 그, 그것은, 하기야 실상은 우리 조상님도…….” ---p.39
‘파리 갔다 온 화가구 미술 평론가야. 대학의 교수직도 싫다고 그만두었지. 재산이 상당하거든. 게다가 멋쟁이구, 나이 틀린다고 싫다 했는데 그까짓 무슨 상관이냐구 결혼하자는 거야. 예술가니까 자유지. 날보구 뭐래는 줄 알어? 완전히 예술품이래. 그것도 생명이 있는 예술이라나? 호호…….’
친구한테 자랑을 늘어놓은 것이 바로 엊그제였었는데, 윤이는 정말 앞이 캄캄했다. 그렇다고 해서 병삼에게 항의할 하등의 건더기도 없었다. 그렇게 믿은 것은 자기 자신의 잘못이었다. 아 니 그렇게 믿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윤이는 마음속으로 병삼의 흠을 헤아리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말랐다는 둥, 나이 젊다는 둥 자기를 위해 큼지막한 선물을 주지 않는다는 둥 하며. 꿈엔들 병삼의 입에서 결혼하라고 타이르는 말이 나올 줄 알았으랴. 사랑은 오직 받는 거로서 주는 것을 몰랐던 윤이 는 또한 자기의 불행도 자각할 수 없는 아름다운 피에로였던 것 이다.
“진실이 모욕이 되는 세상이죠. 뭐 오늘날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가랑이가 찢어져도 황새를 따라갈려는 뱁새의 비극은 바로 그것이 희극이라는 데 있죠. 재능이 없으면서 천재가 되어보겠다고 파리까지 비싼 여비 쓰고 갔다 온 놈을 위시하여 돈푼이나 긁어모은 상놈이 어느 명문 호적에 기재된 이름 석 자밖엔 가진 것 없는 거지 처녀를 비단에 싸서 데려오는 위인, 졸업장 한 장 우물쭈물 얻어둔 덕택으로 학자 행세하게 된 인사, 남의 재간을 계산하고 장래의 대재벌을 꿈꾸는 사람, 사업가 호주머니 털어서 여자나 끼고 다니며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를 넘보는 건달이, 남들은 천 미터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데 겨우 백 미터 지점에서 허둥지둥 뛰면서 사랑의 순결을, 사회의 정의를 목마르게 외치는 전시대적인 친구, 어디 그뿐인가요? 용모도 연기도 신통치 않은 계집애가 정조만 제공하면 황홀한 스타의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생각하고, 사십을 넘은 황혼의 미모로써 폐비 소라야의 호사를 바라보고, 한밑천으로 사내 발목을 묶어놓으면 어부인으로 승격을 믿어 마지않는 요정의 마담, 그리고 또오…… 많죠. 생략하기로 합시다. 나는 항상 말이 헤퍼서 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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