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꾸루꾸꾸 빨로마」 무조건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약수터 민박에서 장기투숙을 하기로 한 그. 혹독한 겨울이라 오가는 손님도 없고, 주인 할머니마저 그에게 민박을 떠맡기고 산 밑으로 내려간다. 그런데 혼자 남아 있는 그에게 갑자기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아무도 입을 것 같지 않은 촌스러운 옷을 팔러 다니는 옷장수, 근처 산신당에서 제를 올리기 위해 찾아온 두 여자, 어렸을 때나 볼 수 있었던 체를 팔러 다니는 체장수, 이미 삼십 년 전에 죽은 옛날 애인까지. 낯설지 않은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떡」 남쪽나라에서 시집온 ‘병점댁’은 남편이 죽은 뒤 공사장 인부들에게 떡과 커피를 팔며 생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곧 사내들이 원하는 건 떡이 아닌 다른 것이고, 그 편이 훨씬 돈벌이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다섯 명의 사내를 줄줄이 상대하던 어느 날, 죽은 남편이 눈앞에 나타나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메밀꽃 질 무렵」 봉평장터에서 좌판을 펼쳐놓고 신발을 파는 허노인의 이름은 ‘동이’이다. 오일장의 장돌뱅이들은 이제 자신만의 트럭에다가 짐을 싣고 다니기 때문에, 나귀의 방울 소리를 들으며 장에서 장으로 갔던 흐뭇한 밤길은 영영 사라진 지 오래이다. 그런데 바로 그 방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아주 오래된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나타낸다. 그들 중엔 동이의 아버지인 허생원도 있다. 「바람자루 속에서」 아내와, 애인인 Y 사이에 무책임하게 끼어 있는 ‘그’는 심야의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는 중이다. 다음 학기 강의를 얻어내기 위해 한 달 치 강의료를 몽땅 접대비로 바치고 돌아가는 ‘그’의 차를 멧돼지와 고라니가 쫓아온다. 심지어 고라니는 ‘그’에게 말을 걸며 히치하이크를 부탁한다. 설상가상 그들은 자신이 접대하고 돌아온 K교수와, Y의 존재까지도 알고 있다.
「북대」 자정 가까운 밤, 홀연 ‘나’의 택시에 올라타 북대로 가자던 다방 아가씨 ‘밀크셰이크’는 그날 결국 북대에 닿지 못한 채 되돌아간다. 손님이 잠든 사이 다녀가려던 것이었는데 잠들었다 깨어난 손님이 전화를 걸어와 항의했던 것. ‘나’는 그날 밤 꿈속에서 스님처럼 배코머리를 하고 있는 그녀와 몸을 섞는다. 어쩌면 다방 아가씨들이 들고 다니는 보자기 속에 진짜 부처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영원히 북대에 가지 못할 거라고 하는 그녀를 데리고 그곳에 닿을 수 있을까. 「사람 살려!」 부잣집 도령인 성기는 하인 개똥이와 함께 한양으로 떠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 길 위에서 사람 아닌 온갖 것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절세미녀로 둔갑한 구미호부터 성기의 갓을 빼앗아 쓰는 호랑이와 씨름하는 도깨비까지. 왜 그들은 자꾸만 성기 앞에 나타나는 것일까. 과연 성기는 무사히 한양에 당도할 수 있을까.
「이별전후사의 재인식」 그와 그녀는 아이엠에프로 “멀쩡했던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앉는” 동안에도 서로 사랑했지만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헤어진 지 팔 년 만에 쇠락해가는 시골마을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이미 제각기 가정이 있지만, 다시 만난 그들은 예전처럼 서로 만나 사랑을 나눈다. 달라진 건 대통령과, 모텔 방에 누워 함께 보던 스포츠경기의 주인공이 박찬호에서 박지성으로 바뀌었다는 사실뿐인 듯싶었지만 이미 많은 것이 달라졌다. 또 그들은 결국 팔 년 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헤어지게 될 터였다.
「저 언덕으로 건너가네」 임질에 걸려 그 최초의 원인 제공자가 자신인지 아내인지 애인인지,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또다른 관계인지를 묻는 택시기사 양봉주는 그 와중에도 수다사로 성지순례를 떠난다. 관광버스 운전기사의 고의적인 난폭운전에 화가 치민 그는 만취한 기사 대신 운전대를 잡게 된다. 사타구니가 따끔거리는 와중에도 운전을 하는 그의 눈에 밤의 고속도로는 눈보라 자옥한 사막처럼 보인다. 그는 스님의 말처럼 정말 어떤 시험에라도 든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