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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문제는 일자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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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5월 06일
쪽수, 무게, 크기 320쪽 | 485g | 153*224*30mm
ISBN13 9788996649892
ISBN10 8996649899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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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세계 문명의 중심축은 한?중?일-한국은 세계 중심 국가가 될 운세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세상은 너무나 달라졌다. 눈 깜빡하는 사이에 태평양 시대가 왔다. 한국?중국?일본이 세계 문명의 중심에 서는 시대, 즉 동북아 시대가 온 것이다. 그 중심에 한국이 자리 잡고 있다.
세계의 선지자와 예언가들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태평양 시대가 온다, 동북아 시대가 온다”며 입을 모았다. 20세기가 저물어갈 때까지만 해도 모두 설마설마했다. 그러나 21세기가 열리자마자 동북아 시대의 진짜 모습이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한?중?일이 세계 문명의 새로운 중심축, 세계 경제의 새로운 성장축, 세계 정치의 새로운 중심지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이다. 선지자들의 예언이 딱 맞아떨어졌다. 바야흐로 한?중?일 3국이 세계 문명을 이끌어가는 새 시대가 열렸다.
--- 본문 중에서

선지자의 예언, 무섭게 맞아떨어지고 있다

역사를 하는 사람이면 모두 한몫 놓아주는 아널드 토인비(Arnold Toynbee, 1889~1975)는 다가오는 21세기를 가리켜 ‘태평양 시대의 개막’이라고 했다. 그는 문명주기설에 입각한 독특한 사관을 전개했다. “역사적인 흐름으로 볼 때 세계 문명의 중심지가 대서양에서 동양과 서양이 맞닿은 태평양으로 옮겨가고 있다. 따라서 고대사에서 지중해가, 그리고 근세사에서 대서양이 담당해오던 문명의 주도 역할이 21세기에 가면 태평양 지역으로 옮겨져 더욱더 확대된 규모로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칼 마르크스, 노먼 멕클레이도 같은 취지의 예언을 했다.
눈과 귀를 국내로 돌려보면 더욱 희망이 넘쳐흐른다. 탄허(呑虛, 1913~1983) 스님은 21세기 초에 들어가면 태평양 시대, 특히 한국의 황금시대가 온다고 내다봤다.
“…간방(艮方)인 우리나라에 간도수(艮度數)가 와서 소남인 청년학도들의 역사적인 출발점이 열렸던 15년 전부터(1960년) 세계는 전세기적인 유산들이 서서히 청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서광과 밝은 희망의 미래를 약속받았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낮 12시가 지나면 이미 밤이 오고 있는 것인데 사람들은 문밖이 밝은 낮이라 하여 낮으로 알고 있듯이 이미 오래전부터 간도수가 시작되었고 후천(後天)의 세계가 눈앞에 와있는데도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합니다. 첫째, 지금은 중국 영토로 되어 있는 만주와 요동반도 일부가 우리 영토로 속하게 될 것이고 둘째, 일본 영토의 3분의 1가량이 바다로 침몰할 것입니다.…”(탄허 스님 법어집 『부처님이 계신다면』에서)
하지만 모두가 믿지 않았다. 희망찬 예언이 쏟아지기 시작한 1950년대까지만 해도 동북아는 희망 없는 버려진 땅이었다. 중국은 여전히 잠자는 사자였고, 아시아의 4룡인 한국과 대만, 싱가포르, 홍콩은 아직 꿈틀거리기 전이었다.
일본만 예외적으로 세계로 뻗어가고 있었다. 중국의 양반 문화?유교 문화가 일본에 가서는 사무라이 문화와 접목되어 열심히 무예를 단련하고 국가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기풍을 진작하는 역할을 했다.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과 유럽의 기사도 정신은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런 문화적 유산을 바탕으로 일본은 일찍 근대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중국이 잠자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경제학자가 태평양 시대고 뭐고 아시아는 희망 없는 나라로 생각했다. 스웨덴의 노벨상 수상자 군나르 뮈르달(Gunnar Myrdal)은 그의 저서 『아시아의 드라마』(1968년)에서 아시아의 농사 경작 방식을 아시아적 생산 양식이라 해서 정말 희망 없는 곳으로 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아시아에서는 4룡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대만으로 쫓겨간 장제스(蔣介石)는 절치부심 재기를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홍콩에서는 홍콩 총독이 중개 무역을 장려하면서 근대화를 서두르고 있었다(1948년). 한국에서는 박정희 장군이 조국 근대화를 외치고 일어섰다(1961년). 싱가포르에서는 리콴유(李光耀)가 총리가 되면서(1965년) 근대화를 서둘렀다. 드디어 아시아의 4룡이 물 위로 솟구쳐 오른 것이다.
일이 잘되어 가느라고 그때까지 근대화의 저해 요인으로 평가절하되었던 유교 문화, 한자 문화, 젓가락 문화가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높은 교육열과 논리적 사고(한자 문화), 그리고 대가족제도와 집단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는 충효 사상(유교 문화)이 근대화의 촉진 요인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한자 문화는 현대 산업 사회에서 가장 잠재력이 큰 문화로 재평가되었다. 충효 사상과 애국애족 사상은 국민의 에너지를 결집하는 데 큰 몫을 했다. 특히 젓가락 문화는 뛰어난 손재주와 섬세함, 집중력을 익히게 해서 인터넷, 반도체, 컴퓨터, IT 중심의 후기 산업사회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1966년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 터졌다. 문화대혁명은 잠자던 사자를 사정없이 흔들어 깨웠다. 깜짝 놀란 사자는 크게 재채기를 했다. 그리고 덩샤오핑(鄧小平)이라는 작은 거인을 토해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면서 덩샤오핑이 재등장했다. 덩샤오핑은 권좌에 복귀하자마자 중국 개혁을 서둘렀고, 중국을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모범국가로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중국은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사업하기 좋은 나라가 되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출현한 아시아의 걸출한 지도자들의 개혁 정책에 힘입어 동아시아 지역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 본문 중에서

잠자는 사자가 깨어나 무한 질주 계속

한참 앞서 뛰고 있던 일본은 1970년대 세계 경제 침체기를 잘 활용했다. 가전제품에서 자동차까지 ‘메이드 인 재팬’이 세계 시장을 휩쓸었다. 일본은 단숨에 ‘세계의 공장’으로 떠올랐다. 팍스 아메리카나는 저물고 팍스 자포니카 시대가 온 것이다.
아시아의 4룡인 한국?대만?싱가포르?홍콩도 부지런히 뛰었다. 새로 등장한 지도자들의 리더십에 힘입어 세계 시장을 무섭게 파고들었다. 네 나라는 경제성장률이 연 8%, 9%씩이나 되었다. 그들은 금방 신흥공업국이라는 타이틀을 얻어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중국은 무한 질주를 계속했다. 먼저 외국 자본을 끌어들였다. 외자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유치했다. 외자와 함께 기술도 들여오고 경영 기법도 도입했다. 수출 길도 외자에 의존했다. 지난 20여 년간 경제성장률은 11~12%씩이나 되었다. 그러고도 인플레이션을 용케 피했다. 위안화도 안정되어 생산과 수출은 탄력을 받았다. 세계 경제사상 인플레이션 없이 20년 넘게 11~12%에 달하는 고도성장을 유지한 나라는 중국 외에는 없었다.
경제가 성장하고 소득수준이 올라가면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고 다원화?다양화 요구가 끝없이 이어진다. 동시에 국민의 욕구가 일시에 분출하여 국가적으로 혼란과 갈등이 첨예화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중국은 이런 혼란과 갈등을 잘 극복하고 아직도 8% 내외의 고도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중국의 무한 질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외환 보유고가 3조 2천억 달러를 넘어서 세계 최대 외환 보유국이 되었다. 이제는 국내 과잉 통화팽창을 막기 위해 달러 쓸 궁리를 하고 있다. 먼저 미국 국채를 마구 사들였다. 다음으로는 해외 자원 확보를 위해 석유, 석탄, 목재, 금광 등 닥치는 대로 자원 개발에 나섰다. 지금은 해외여행 자유화를 서두르고 있다. 요우커(遊客, 정부의 허가를 받은 해외여행객)가 벌써 7천만 명을 넘어섰다. 이제 중국인 해외여행객은 눈 깜짝하는 사이에 세계 여행 시장의 큰손이 되었다.
마침내 중국은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 일본을 추월했다. 3위 자리는 자동적으로 일본의 몫이 되었다. 세계의 공장은 팍스 자포니카에서 팍스 시니카로 대이동 중이다. 중국은 앞으로 10년 이내에 세계 제1의 경제대국 미국을 앞지르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다. 동북아 시대-선지자?예언가들이 농담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그럼 일본은 어떻게 되는가? 일본은 그동안 정치 불안과 엔고의 영향으로 잃어버린 20년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의 저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20세기 세계 최강의 일본 경제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일은 절대 없다.
일본은 지금 리더십의 복원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잃어버린 20년을 리더십 부재 때문으로 보고, 정치 리더십을 회복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아베 총리가 한국, 중국과 영토 분쟁을 일으키고 엔화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 것은 모두 리더십을 회복하기 위한 상투적인 수법이다. 그리고 실제로 아베 효과가 벌써 나타나고 있다.
세계 2?3위의 경제대국에 가려져 있지만, 아시아의 4룡도 열심히 뛰고 있다. 4룡 중 선두 주자이자 규모가 가장 큰 한국은 지난 2012년 20-50클럽(1인당 GDP 2만 달러, 인구 5천만 명 달성 국가)에 가입했다. 이제 잃어버린 10년을 마감하고 새 대통령을 맞아 희망의 10년을 열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희망의 10년은 새 대통령과 그다음 대통령이 열쇠를 쥐고 있다.
20년, 30년 전만 하더라도 꿈도 꾸기 힘들었던 태평양 시대, 동북아 시대가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다. 세계 문명의 중심에 한국, 중국, 일본이 자리 잡았다. 이제 한?중?일이 세계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가면서 세계 정치를 리드하게 되었다. 마침내 동북아 지역이 세계 문명의 새로운 중심축, 세계 경제의 새로운 성장축, 세계 정치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른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역사는 반면교사다-박정희 창업 모델?김대중 수성 모델

20세기 후반, 한국이 낳은 두 거인-박정희와 김대중은 팍스 코리아나로 가는 길(Pax Koreana Road)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운명적으로 해후하게 된다.
두 지도자는 처음 적대관계에서 출발한다. 한 사람은 대통령, 한 사람은 야당 지도자로 정적이 된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한 사람은 여당 후보, 다른 한 사람은 야당 후보로 맞섰다. 1980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엄청난 유산을 남기고 세상을 하직한다. 그가 남기고 간 경제 발전은 한국 민주화의 밑거름이 된다. 그때 민권운동가였던 김대중은 본의 아니게 박정희의 유산인 ‘한강의 기적’을 상속받는다.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들이 교만과 방자에 빠져 상속 재산을 다 까먹어갈 무렵 IMF 사태가 터졌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어 소멸 직전의 위기에 몰린 한강의 기적을 다시 살려낸다. 이때를 계기로 박정희?김대중, 두 대통령은 화해?화합?상생의 길로 들어선다.
--- 본문 중에서

한국 현대사가 낳은 두 거인

흔히 중국 5천 년 역사에서 최고의 황제로 당태종(唐太宗)을 꼽는다. 당태종은 말년에 고구려 침공에 나섰지만 유명한 안시성싸움에서 혼쭐이 난 후 장안으로 돌아와 다시 내치에 힘썼다. 특히 사치를 금하여 건전한 기풍이 사회 전반에 스며들도록 했다. 유명한 정관의 치[貞觀之治]를 역사 속에 남겼다.
당태종은 측근들과 함께 치세(治世)를 논한 적이 있었다.
“경들은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중 어느 쪽이 어렵다고 생각하오?”
그러자 우복야(右僕射) 방현령(房玄齡)이 말했다. “창업은 비 온 뒤의 죽순처럼 일어나는 뭇 영웅들을 제압해야 가능한 일이므로 역시 창업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간의대부(諫議大夫) 위징(魏徵)이 나섰다. “옛날 사실(史實)을 돌이켜보건대 임금 자리는 갖은 고난 속에서 어렵게 얻었다가도 안일함 속에서 쉽사리 잃곤 했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만과 방자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폐하는 욕망을 억제하고 스스로 절약과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그러므로 수성이 어렵습니다.”
두 의견을 듣고 난 후 당태종이 말했다. “창업과 수성 어느 것이 더 어렵고 덜 어렵겠소. 짐은 둘 다 똑같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이제 창업의 어려움은 지나갔으니 앞으로 공들과 함께 수성에 힘쓸 것이오.”
나라를 세우는 창업은 어렵다. 정권을 세우는 것도 어렵다. 그러나 정권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수성은 더욱 어렵다. 창업에 성공하면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교만과 방자에 빠지기 쉽다. 결국 교만과 방자는 통치자의 무덤이 된다.
한국은 난세의 창업과 치세의 수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근대화와 현대화의 최단 코스를 달려왔다. 지난 50년 동안 한국 경제는 시장경제 250년사가 걸어온 발전 궤적을 숨 가쁘게 달려온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 현대사가 낳은 두 사람의 걸출한 지도자, 박정희와 김대중은 운명적 해후를 하게 된다. 그리고 숙명적 대결과 경쟁과 상생의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된다.
한 사람은 장군 출신으로 쿠데타를 통해 집권에 성공한다. 다른 한 사람은 민중항쟁을 통해 민주화를 성취하고 집권에 성공한다. 한 사람은 독재자로서 민주화 운동가를 박해하고, 다른 한 사람은 독재에 저항하면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한다. 한 사람은 난세의 창업에 성공하고, 다른 한 사람은 치세의 수성에 성공한다. 한 사람은 조국 근대화의 기치를 내걸고 경제개발을 강력히 추구하고, 다른 한 사람은 경제 발전을 위해 자신이 내건 경제 철학인 대중경제를 스스로 청산하고 시장경제주의자로 변신해서 글로벌 경제시대를 열어간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한국 경제의 최종 목표인 일자리 혁명을 통해 운명적 화해를 하게 된다. 마침내 대결 구도에서 동반자 관계로 전환됐다. 한 사람은 일자리를 늘리고, 다른 한 사람은 일자리를 지켰다. 박정희 대통령은 창업 모델을, 김대중 대통령은 수성 모델을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 사람은 그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추진했던 조국 근대화를 향한 경제개발 정책의 성공을 통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권위주의를 버리고 민주화를 재촉했다. 소득수준의 급속한 향상이 민주화를 채찍질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박해했던 정적이 대통령이 되는 길을 열어주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와 경제개발 정책이 성공했기 때문에 IMF 위기 때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치세(治世)에 성공한 대통령이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박정희 없이 김대중 없다”가 되어버렸다.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 계획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과연 김대중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대한민국은 저개발 상태에서 독재와 반독재 투쟁을 하면서 극도의 혼란이 이어졌을 것이고, 결국 두 사람 다 실패한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저개발 국가와 소득수준이 낮은 나라, 특히 일자리가 없는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어차피 쿠데타와 민주화운동이 악순환하는 불완전한 정치제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라인강의 기적을 능가한 한강의 기적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 근대화를 위해 경제개발 계획을 의욕적으로 밀어붙였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출 제일주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서둘렀다. 포항제철 건설을 위해 대일 국교도 정상화했다. 대일 청구권 자금은 포항제철 건설에 몽땅 퍼부었다. 또한 기업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사채 동결령을 선포했다. 공업화를 촉진하기 위해 새마을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마침내 경제개발을 재촉하기 위해 10월 유신을 단행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정말 체계적으로 추진되었다.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길을 아주 잘못 들었지만,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엄청난 성취였다.
1차 5개년 계획은 경공업?농산품 가공, 생필품 육성에 역점을 두었다. 2차 5개년 계획은 기계?부품공업?토목공사를 중점적으로 추진했다. 3차 5개년 계획의 중점 사업은 중화학공업 건설로 조선?전자?석유화학, 자동차?철강?기계공업 육성에 힘썼다. 4차 5개년 계획은 중화학공업 육성을 마무리하고 첨단공업 육성에 나섰다. 이러한 경제개발 계획 추진 과정에서 일본 메이지 유신 때의 근대화 과정에서처럼 많은 재벌이 생겨났다.
박정희 시대의 체계적인 경제개발 계획은 세계 경제사에서 처음 보는 대사건이었다. 계획 경제의 원조 격인 소련에서도, 후계자 격인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성공적인 개발 계획이었다. 특히 의욕적인 개발 계획의 성공으로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개발 계획의 성공은 산업 혁명과 동시에 일자리 혁명을 불러왔다. 영국은 농업 혁명이 인구 혁명을 불러오고, 이후 산업 혁명이 일자리 혁명을 불러왔다. 그런데 한국의 경제개발 정책은 농업 혁명 과정을 생략한 채 단숨에 산업 혁명과 일자리 혁명을 이끌어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동하면서 농촌 인구는 대거 도시로 몰려들었다. 산업 혁명기에 영국의 농촌 인구가 산업예비군이 되어 도시로 몰려든 것과 같았다. 우리나라 농촌 인구 비중은 1960년 72%에서 1970년에는 58%로 줄었다. 1980년에는 42%로 줄어 도시와 농촌 지역의 인구 비율이 역전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대에 한국의 산업 혁명과 일자리 혁명이 완성된 것을 확인하고 세상을 하직했다.
박정희 대통령 재임 18년간의 경제 발전 과정은 영국 경제 180년간의 발전 과정과 맞먹는다. 영국의 발전 속도보다 10배가 빠른 것이다. 한국의 산업 구조는 농업인 1차 산업 중심에서 제조업인 2차 산업 중심으로 바뀌었다. 일자리 혁명도 1차 자유방임 시대, 2차 수정주의 시대를 뛰어넘어 3차 신자유주의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박정희 시대의 경이적인 경제 발전을 가리켜 ‘한강의 기적’이라 부른다. ‘한강의 기적’은 2차 세계 대전 후 독일의 아데나워?에르하르트 콤비가 전쟁의 폐허에서 독일 경제를 일으킨 ‘라인강의 기적’과 비교된다. ‘라인강의 기적’과 ‘한강의 기적’은 아직까지도 세계 경제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공 사례로 남아 있다.
‘한강의 기적’을 실감케 하는 3개의 사례가 있다. 첫째, 박정희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1961년 북한의 1인당 GDP는 대한민국을 웃돌고 있었다. 그때 북한은 소련을 따라 계획 경제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소련의 무상지원 13억 루블과 동유럽 공산권 국가 및 중공의 지원에 힘입어 한국을 한참 앞서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장군의 등장으로 금방 판세가 역전되었다. 같은 개발 독재를 했지만 지도자의 리더십에 따라 오늘과 같은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됐다.
둘째, 광화문 앞 세종로에 자리 잡은 문화관광부 청사와 미국대사관 건물은 5?16 직후 필리핀 건설회사가 지었다. 당시에는 필리핀이 한국보다 많은 것이 앞서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 국력과 필리핀 국력을 따져 보면, 그것은 박정희 리더십과 마르코스 리더십의 차이로 볼 수밖에 없다.
셋째, 독재자들에게는 늘 단골로 따라다니는 메뉴가 하나 있다. 바로 부정 축재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부정 축재와 관련 없는 유일한 독재자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독재는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를 심하게 훼손했다. 그러나 물적 자원과 인적 자원이 없는 상태에서의 개발독재는 민주화의 길을 여는 순기능도 뒤따랐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발전 모델은 후진국 개발 이론의 교과서 노릇을 했다. 덩샤오핑의 발전 모델도 박정희의 개발 모델을 복습한 것이다. 실제로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사상의 캐치프레이즈가 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은 5?16 쿠데타 이후 부정 축재자들을 모두 구속했다가 풀어주면서 그들이 경제개발 계획에 참여하도록 해서 경제 발전의 주역이 되게 한 박정희 대통령의 실용주의와 맥락을 같이한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의 뒤를 이어 집권한 신군부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발맞추어 개방화?자유화 정책을 폈다. 국내 경제 운용을 자유화하고 대외 개방을 통해 무역 자유화를 강하게 밀어붙인 것이다. 분명히 속도위반이었다. 큰 사고가 날 것 같았다.
자유무역주의는 강자의 논리다. 영국이나 미국 등 경제적 강자들이 세계화와 무역 자유화 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은 자기네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다. 1980년대 초, 시카고 보이(시카고학파)들이 남미 칠레에 건너가 무역 자유화 정책을 설교하고 있었는데, 이후 남미 국가들의 제조업 말살로 귀결되었다.
--- 본문 중에서

창업보다 어려운 수성-국가 파산 막아

결국 1997년 11월 21일, 한국 정부는 IMF에 국가 경제를 위탁했다. 국내 금융(단자회사?자동차보험사?신용금고?저축은행) 자유화, 무역 자유화, 해외여행 자유화, 외환 자유화, 자본 자유화, OECD 가입 등 숨 가쁘게 자유화?개방화 정책을 추진하다가 IMF 사태를 맞은 것이다. 이때 포스트 박정희 정권들이 자유화했던 단자회사?종금사는 IMF 사태를 불러온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상호신용금고는 오늘의 저축은행 사태의 원인이 되었다. 잘못된 정책 결정이 이런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1997년 12월 12일, 청와대에서 비상경제대책 자문회의가 열렸다. 김영삼 대통령은 “모라토리엄 얘기가 나오던데…” 하고 운을 뗐다. 자문위원으로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필자는 즉시 반박했다. “모라토리엄을 하게 되면 모든 대외 거래는 외상이 불가능해서 현금 거래를 해야 하는데, 달러가 없으면 기름을 살 수 없고, 기름이 없으면 고층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멎고, 난방이 끊기고, 수세식 변기를 쓸 수 없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 후 모라토리엄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15대 대통령 선거는 IMF 외환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경제가 어려울 때 선거를 치르면 정권이 바뀌는 법이다. 예상대로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다. 수평적 정권 교체라는 역사적인 큰 사건이었다. 이때의 정권 교체는 후계자들이 교만 방자에 빠져서 절약과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민이 선택한 것이었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신한국당(현 새누리당)의 실정과 경제 위기 말고도 김대중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될 만한 조건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대선 기간 중 IMF 측은 환율 자유화와 금리 인상 등 강력한 긴축을 요구했다. IMF의 요구는 15년 전 시카고 보이의 주장과 똑같았다. 환율은 단숨에 달러당 1,500~1,700원 선으로 2배나 뛰어올랐다. 금리도 회사채 금리가 25% 선으로 2배 뛰어올랐다. 국내 기업이 전멸할 위기였다.
이때 IMF의 요구를 수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중요한 대선 이슈로 떠올랐다. 당시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와 당 총재는 IMF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대부분의 교수와 학자들도 시카고 보이의 주장에 동조하는 분위기였다(당시 IMF와 시카고 보이는 한통속이었다).
이때 야당의 김대중 후보는 IMF 권고대로 가면 한국 경제가 거덜 난다며 국내 사정에 맞게 IMF와 협상을 통해 고금리 정책이 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대중 후보는 신한국당과 학계로부터 감히 IMF 권고를 무시하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5대 대통령을 뽑는 운명의 순간, 국민은 김대중 후보의 손을 들어주었다. 만약에 고환율?고금리 정책이 1개월 더 지속됐다면 대한민국 산업은 전멸했을 것이다. 시카고 보이가 뒤흔들어 놓은 칠레처럼 금융 기관, 특히 은행은 대부분이 외국계 은행에 M&A 되었을 것이다.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고 당선인 자격으로 IMF와 딜을 하면서 살인적인 고환율?고금리 정책을 누그러뜨렸는데도 IMF 때 국내 30대 기업 그룹 중 절반 정도가 주인이 바뀌었다. 특히 은행을 비롯한 금융계는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20여 개 종금사는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은행들은 모두 반신불수가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은 하늘의 축복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일구어 놓은 한강의 기적이 파산신고를 하려는 순간 김대중 대통령이 수성을 잘했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 경제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97년 12월 19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이 물려받은 외환 보유고는 달랑 37억 달러였다. 그것도 장부상의 외환 보유고였다. 실제로는 마이너스였다. IMF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지만 국가 부도는 시간문제였다.
그보다도 국가 경제의 혈액을 공급하는 은행들이 부도 상태였다. 대부분의 은행은 BIS 비율(국제결제은행 기준 자기자본 비율)이 8%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한국의 은행들은 국제 금융사회에서 은행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은행들은 자금 여력이 없어 국내에서도 자금난을 호소하는 기업에 자금 지원을 해줄 수 없었다. 30대 재벌그룹 절반이 부도 상태였으니까 정말 위기의 순간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공적자금 카드를 내놓았다. 예금보험공사의 채권 상환기금, 부실채권 정리 기금, 공공자금 관리 기금, 한국은행의 금융기관 출자 기금, 공공차관 자금 등 정부가 손을 대서는 안 되는 비상 자금을 총동원해서라도 쓰러져가는 은행과 부실화된 기업을 살려내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과 같은 것이었다. 처음 80조 원을 긴급 투입하고 단계적으로 160조 원을 은행의 증자 및 부실기업 지원에 투입해서 은행과 부실기업을 살려냈다.
이때 김대중 대통령이 공적자금 투입과 금리 인하 조처를 한 달만 늦추었어도 국내 모든 은행과 30대 재벌 그룹 대부분이 재기불능 상태가 됐을 것이다. 그리고 한 달만 빨랐더라면 대우그룹을 비롯한 30대 재벌 그룹의 상당수가 주인이 바뀌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공적자금의 신속한 투입으로 한국 경제의 파산을 막았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일구어 놓은 한강의 기적이 흔적 없이 사라지려 하는 것도 막았다. 이를 통해 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진 빚을 갚았다. 자신이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답한 것이다. 이때부터 김대중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구원을 청산하고 서로 협력하고 보완하는 상생의 길을 걷게 된다. 마침내 “김대중 없이 박정희 없다”는 가설이 입증됐다. 두 지도자는 이렇게 적대관계에서 경쟁관계를 거쳐 화해?상생의 길을 걷게 된다. 영?호남 화합의 기회도 함께 열었다.
--- 본문 중에서

적대-경쟁-상생관계로 변증법적 발전

두 지도자의 관계는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적인 발전, 즉 정(正)?반(反)?합(合)의 3단계를 거쳐 전개되고 발전된 것이다. 마침내 두 거인은 힘을 합쳐 팍스 코리아나로 가는 길을 열었다. 박정희의 창업 모델은 후진국 개발 이론의 교과서 노릇을 한다. 그리고 김대중 수성 모델은 세계 경제 위기 극복의 기본 모델이 된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과감한 공적자금 투입에 모든 국민은 겁을 집어먹을 정도였다. 특히 정치권에서 난리가 났다. 야당인 한나라당이 대정부 공격의 선봉에 섰다. 국회에 공적자금 특별위원회가 설치되고 공청회까지 계획되었다. 공적자금 특별위원회는 3~4차례 열리다 말았는데 대부분의 특별위원들은 공적자금 회수율이 15~20% 수준에 머물 것이라며 비관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하지만 필자는 공적자금 투입으로 은행이 살아나고 기업이 살아나면, 증시가 살아날 것이고, 증시의 주가지수가 1,000 선을 넘으면 공적자금 회수율은 60% 수준이거나 그 이상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파격적인 주장에 다른 위원들은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결국 필자의 주장이 맞아 들어갔다.
지난 2012년 1월 말 공적자금 운용 현황을 보면 1998년부터 2012년까지의 공적자금 투입액은 168조 7천억 원으로, 이 중 105조 2천억 원이 회수되어 회수율은 62.2%에 달한다. 당초 목표치인 25%의 2.5배나 회수된 것이다. 여기에 은행 및 공적자금이 투입된 부실기업의 자산 가치 상승과 수조 원씩 이익을 내는 기업들의 엄청난 수익성을 감안하면 공적자금은 투입액의 3배 이상의 경제적 성과를 올렸다. 공적자금 투입은 한국 경제를 위기에서 건져낸 쾌거였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런 성과는 없었다. 공적자금이 만들어낸 기적이라고 할까?
그러나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공세는 정말 심각했다. 한나라당 제2정책조정위원장은 2000년 11월 23일 기자회견을 갖고 150쪽 분량의 공적자금 백서를 배포하면서 “공적자금 집행 상태가 워낙 엉망이어서 2차 자금 조성분에 대해서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후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미 투입된 공적자금 손실액이 90조~110조 원에 달한다면서 추가로 투입될 공적자금 손실액 30조 원 등 총 120조~140조 원(이자 제외 80조 원)을 회수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한나라당 정책 책임자가 그 정도 수준이었다.
IMF 위기를 맞았을 때 국민도 팔을 걷어붙이고 새 정부의 위기 극복 노력을 지원했다. 주가가 폭락하고 주식이 휴지 조각처럼 취급되고 있는 가운데 필자가 사장으로 있던 한국일보는 남덕우 전 총리와 함께 ‘경제살리기 증권갖기 저축운동’을 벌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금 모으기 운동’은 많은 단체와 국민이 참여했고 세계적인 국난극복 모범사례로 기록되었다. 이때 한국일보는 (MBC와 공동으로)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금 모으기 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어갔다. 당시의 감동적인 사진이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 ‘생활의 길잡이’에 소개되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팔을 걷어붙이고 위기 극복에 나섰다. 금리 인하, 정리해고, M&A, 빅딜, 구조 조정, 생산적 복지, 공적 자금 160조 투입, 4대 개혁(공공 부문, 금융?기업?노동 개혁), 남북 정상회담, 햇볕정책 등 위기를 맞아 내놓을 수 있는 개혁 정책을 모두 쏟아냈다. 한때 반체제 인사로 분류되기도 했던 정치인이 어떻게 그런 위기극복 대책을 내놓을 수 있었는지, 그의 능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개혁 정책으로 가장 큰 수혜를 받은 쪽은 아이러니하게도 은행과 국내 대기업이었다. 재벌 대기업은 김대중 대통령의 개혁 정책 이후 10년 동안 매출은 3~4배, 당기 순익은 0이 하나 더 붙어 10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제 순익 1조 클럽에 들어간 기업이 수두룩하다. 그럼에도 재벌 그룹은 김대중 대통령의 개혁 정책에 시큰둥해하면서 더러는 좌파로 매도하기도 한다. 이것은 배은망덕이라기보다는 무식의 소치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김대중 대통령의 최고의 선택은 그의 정치?경제 철학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및 햇볕정책이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가치 질서와 행동 규범이 같은 것-개인이 자유와 창의에 의해 열심히 노력하면 개인의 행복을 가져오고 개인 행복의 합계는 국가의 행복, 즉 국민의 행복이 되는 정치?경제 체제를 말한다.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이 그 원류이고 이념적으로는 중도실용주의가 기본 이데올로기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계기로 한국의 정치 체제는 단숨에 미국 수준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국내에서는 이데올로기 논쟁, 노사 분규가 크게 줄어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실패했지만 그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수구보수주의자들은 햇볕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퍼주기 정책이다, 퍼주기가 핵무기 개발에 전용됐다… 하고 성토한다. 물론 그 말도 맞다. 수구 세력은 미친개는 몽둥이로 두들겨 패야 한다고 응수한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무책임한 주장이다. 북한은 그런 강경책이 두려워서 핵 개발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좀 더 냉정하게 북한 측 내부 사정을 들여다보자. 햇볕정책을 제안하기 이전부터 북한은 개혁?개방을 서둘렀다. 노태우 정부 때에는 김달현 부총리 팀을 남한에 내려보내 남북한 평화 공존의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남북한 간의 엄청난 격차에 깜짝 놀랐다. 도저히 경쟁 상대가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들은 남북협상에서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내부 체제가 흔들렸다. 온건개방파가 밀리고 강경 군부가 주도권을 잡았다. 군부 또한 핵 공갈 말고는 대안이 없었다. 결국 체제 유지를 위해 협상의 문을 닫고 다시 핵 개발에 나섰다. 북한 입장에서는 체제 유지가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햇볕정책을 포함한 여러 가지 대안으로 북한의 핵 포기를 이끌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후 노무현 정권의 등장으로 이데올로기 논쟁이 다시 불거진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일부 수구 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싸잡아 좌파 정권으로 매도한 것은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이념적으로 전혀 다른 정권이다. 김대중 정권은 진보(대중경제)에서 중도실용주의(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전향한 정권이다. 노무현 정권은 급진을 넘나드는 이념 성향의 정권이다.
성공한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과 성공한 반체제 인사 김대중 대통령은 일자리를 매개로 서로 결합됐다. 한 사람은 난세의 영웅으로, 다른 한 사람은 치세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했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대한민국을 팍스 코리아나의 길로 인도하고 모두 세상을 떠났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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