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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사랑

그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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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5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416쪽 | 434g | 128*188*30mm
ISBN13 9788925132914
ISBN10 8925132915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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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스름한 새벽빛에 물든 안개 낀 바닷가의 모래사장을 걸으며 희주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다 저만치 먼 곳에 자신을 기다리며 서 있는 남자를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그림자처럼 까만 남자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들자 남자가 손바닥에 가렸다. 이렇듯 손바닥에 가리는 작은 남자를 바라보았던가. 느릿하게 손을 쥐어보지만 식은 제 손바닥만 느껴졌다. 아린 손끝을 주머니 속으로 숨기며 희주는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입술 새로 스산한 겨울 안개가 스며든다. 저벅저벅. 빗소리 같은 파도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그의 앞에 마주 섰다.
새파란 안개에 유일하게 물들지 않는 까만빛의 남자. 어느 곳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고고한 빛을 내는 남자의 눈빛과 하고 싶은 말만 뱉으며 살 것 같은 남자의 반듯한 입술을 훔쳐본다.
“오늘 따라 걸음이 느리네.”
한참이나 느린 그녀의 걸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의 반듯한 눈썹이 구겨진다.
“힘들어서요.”
“올라갈까?”
“아뇨.”
희주는 대답을 하며 손을 들어 그의 눈썹을 문질러 주었다. 일자로 반듯하게 펴진 눈썹을 보며 옅게 웃는다. 인상을 쓴 모습보다는 무표정한 이 얼굴이 좋다. 세상 끝에 내몰린 사람들처럼 둘만 덩그러니 자리한 새벽빛 바닷가. 자욱한 안개 때문에 한 치 앞도 구분할 수 없는 지금,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고 희주는 빌어본다. 그러나 그 기도도 한숨처럼 흩어져 날린다.
시간이 멈추고 세상에 둘만 남는다고 한들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함께 공유하는 공기는 같으나 마음의 시간이 다른 사람들. 그것이 자신과 그임을 희주는 너무도 여실히 잘 알고 있었다.
“왜.”
하염없이 바라보는 희주의 시선이 불편한 듯 그의 미간이 다시금 좁혀졌다. 그녀는 한 번도 그를 이런 식으로 바라본 적이 없다.
“할 말 있어?”
그와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지만, 지체했다간 두말없이 돌아설 그의 성격을 알기에 희주는 입술을 벌렸다.
“네.”
“뭔데?”
겨울바람만큼이나 냉랭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희주는 옅게 웃었다. 그러나 이내 웃음이 사라진다. 추위를 가중시키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희주의 입술이 열렸다.
“우리 헤어져요.”
차가운 공기 속으로 뜨거운 입김이 흩어진다. 이어 이별을 고한 입술 끝이 점점 시려온다. 그래서 그녀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뱉고도 좀처럼 믿기지 않는 이 말을 겨우 납득하게 해주는 이 추위가 고맙다.
그의 구겨진 미간이 일순 탁 풀린다. 푸른빛의 안개를 마시고, 푸른빛의 안개를 뱉으며, 이것이 현실인지 아닌지조차 구분되지 않는 묘한 곳.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그는 한참 만에 다시 한 번 물었다.
“왜?”
희주는 고개를 들어 똑바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속살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뱉는 말이 파도 소리에, 안개에, 바람에 산산조각 나서 사라졌다. 말을 마친 희주는 희미하게 웃으며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안개가 서서히 사라지고, 푸른빛마저 녹아버리는 아침이 오고 있었다. 돌아선 희주가 천천히 걸어왔던 길을 밟아갔다. 느리게 걸어오던 속도보다 빠르게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그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거든.”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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