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일본의 영토였던 남사할린은 한인의 땀과 고혈로 얼룩진 역사의 현장이다. 일본의 입장에서 남사할린은 천연자원이 풍부한 보고이자 쿠릴 열도와 함께 태평양 방어의 거점이었다. 일본제국주의는 자원 개발을 위해 대량의 노동력 투입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만주사변(1931년)을 시작으로 전쟁이 장기화되자 1938년에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였다. 일본의 본토와 식민지, 점령지를 대상으로 인적·물적 자원에 대한 총동원 정책을 실시하였다. 한인을 동원하여 동원노무자, 군인, 군무원, 위안부 등으로 배치시켰다. 일본은 동원된 사람들에게 강제 노동을 강요하고 일정의 임금을 지불한다고 약속하였지만 현재까지 약속 받은 급여조차 지급하지 않고 있다. 이에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와 기업에 1990년 초부터 소송을 하고 있지만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을 근거로 일관하여 패소하거나 기각되어 개인 청구권조차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한인을 모집한 방식은 세 가지 방법 즉, 할당 모집(1938년~1945년), 국민 징용국민 징용(1939년~1945년), 관 알선(1942년~1945년)으로 진행되었다. 첫째, 할당 모집할당 모집은 조선총독부의주도로 노무자를 모집, 송출하는 방식이다(박봉수, 2016). 송출 지역과 할당 인원을 결정하고 허가하면 지역 행정 기관이 기업을 통해 모집 담당자와 함께 노무자를 송출하였는데 이때 수송책임은 행정기관과 해당 기업이 담당하였다. 둘째, 국민 징용은 국민징용령 및 국민직업능력신고령에 의해 일본 정부가 직접 선정하여 징용영장을 발부하고 송출하는 방식이었다. 행정기관이 직접 노무자 선정에서 수송은 물론 식량 조달과 인력 관리를 하였다. 셋째, 관 알선은 사업자 또는 대행 단체가 선정하면 조선총독부가 모집 지역과 인원을 결정하고, 조선총독부와 지방 행정기관, 경찰, 조선노무협회, 직업소개소 등이 협력하여 노무자 선정에서부터 송출하는 책임도 각 기관이 공동으로 담당하였다.
이처럼 많은 한인이 일제에 의해 남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되면서 본격적인 노동이주가 시작되었다. 사할린 한인은 탄광, 군수공장 벌목장 등에서 인권을 유린당한채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은 해상 연료 운반이 어려워지자 사할린 한인 노동자사할린 한인 노동자를 일본 큐슈로 이중 징용시켜 아직도 생사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이에 유가족들은 ‘사할린주 한인 이중징용광부 유가족회’를 결성하여 적극적으로 책임의 소재를 규명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인들은 모두 본국으로 송환되었지만 한인들은 귀환시키지 않아 무참히 버림을 받았다. 심지어 일본으로 귀환하기 전 한인들이 소련군과 협작하여 일본인들에게 해를 입힐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무고한 한인 27명을 무참히 사살하였다. 사할린 포자르스코예에는 그 때 희생당한 27인의 한인을 애도하는 비가 세워져 그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증명하고 있다.
사할린 한인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사할린에 억류되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살아야만 했다. 사할린 한인들은 일본과 소련의 틈바구니에서 한인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었을 뿐만 아니라, 무국적자무국적자로 편견과 차별의 고통을 겪어 왔다. 그렇지만 사할린 한인은 강제징용이라는 긴 통한의 설움을 우리 민족이 지닌 고유의 성실함으로 극복하였고, 특히 자녀들을 위한 민족 교육민족 교육에 힘썼다(박봉수·김영순, 2016).
이런 노력들은 사할린 도처에 역사와 장소를 통해 알 수 있다. 한인 밀집 지역에 조선학교를 설립하여 모국어 교육뿐만 아니라 민족사상과 민족의 전통 문화교육을 추진해 왔다. 이런 추진의 중심에는 당연히 한인 교육지도자들이 기여해 왔다. 그 결과 사할린 한인들이 민족 정체성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고 민족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교육운동교육운동은 사할린 한인들의 자발적인 운동이었다는 것에 커다란 의의가 있다(한국이민사박물관, 2015). 물론 사할린 한인들에게 민족 교육은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1963년 소련 정부는 조선학교 전면 폐교령을 내렸으며, 이에 따라 우리 민족의 정체성 계승에 위기를 가져왔다. 소련은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에게 모국어 교육 및 모국어 사용 금지 정책을 시작했다. 모국어 사용과 습득 기회를 박탈당해 온 한인들은 식민과 피식민의 관계에서 제대로 된 민족 교육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사할린 한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거주국 사회의 제한된 기회구조 내에서 신분상승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
현재 사할린 한인 3세, 4세는 가정 내에서도 부모들과 러시아어로 의사소통하고 한민족의 역사, 문화에 관한 지식은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한국어와 한국 문화의 계승은 어려운 실정이다(김인숙, 2012). 그 이유는 3세, 4세들의 한국어한국어에 대한 열정도 높지 않으며 한국어를 모국어로 여기기보다는 외국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임엘비라, 2010). 이는 사할린 한인들의 민족 정체성 해체에 적잖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런 이유로 본 저술은 사할린 한인 사회에서 오랫동안 민족 교육에 힘 써 오신 4명의 민족 교육 지도자들의 삶을 다룬다. 이들의 공헌을 통해 사할린 한인 사회의 민족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며, 이런 그 들의 수고를 기억하기 위함이다.
재러 지역의 한국어교육한국어교육에 대한 연구는 주로 러시아 대륙의 한국어교육(빅토르 코쥐마코, 2006; 한용, 2010), 한국학에 관한 연구(권세은, 2012; 김경일, 2003; 김형규·장호종, 2008; 레브 콘체비치, 2007; 반병률, 2004; 장호종, 2006) 등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사할린 지역의 한국어교육에 관한 연구로는 민현식(1998), 임엘비라(2010), 조현용·이상혁(2011), 김인숙(2012) 등이 있을 뿐이다. 민현식(1988)은 사할린 지역의 한국어 환경에 대하여 조사하였으며, 임엘비라(2010)는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과 이후 사할린 지역의 조선학교 현황을 검토하였다. 또한 조현용·이상혁(2011)은 사할린 지역의 언어 환경과 한국어 교재의 문제점 파악에 주목하였고, 김인숙(2012)은 사할린의 한국어교육기관은 어떤 교재와 보조 교재로 어떻게 교육하고, 어떠한 문제점이 있는지를 연구하였다.
이와 같은 선행연구에서는 한국어교육의 현황조사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한국어교육을 실질적으로 담당하였던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는 미흡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한 것은 바로 한국어교육의 일선을 담당했던 한국어교육가들이 어떤 연유에서 이 일을 시작했고, 어떤 방법으로 한국어를 가르쳤고, 어떤 마음으로 임하여 왔는지 등에 관한 생애사적 내용들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사할린 한글 교육한글 교육의 역사적 증인으로 살다가 영주귀국한 모국어 교육 경험을 지닌 4명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사의 삶은 어떠하였는지를 생애사적 연구 방법생애사적 연구 방법으로 들여다보고자 한다. 또한 이들이 노령자라는 점에서 사진을 통해 기억을 재생시키는 포토텔링 활용 방법포토텔링 활용 방법을 사용하여 역사의 상흔을 치유할 목적도 달성할 수 있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소련의 모국어 사용 금지 정책으로 25년 동안 민족어 습득의 기회를 박탈당해 온 척박한 환경에서 다음 세대에게 모국의 문화와 모국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남다른 사명감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들 한국어 교사의 기억을 기록하고자 한다.
---「사할린 한인과 모국어 교육」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