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꼭지에 매달린 과일과 같다. 꼭지가 없으면 과일도 없다. 마하라지가 지치지도 않고 바로 그 꼭지, 모든 마음들이 매달려 있는 그곳, 즉 내가 있다는 느낌에 집중하라고 요구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마음을 가만히 한 곳(그것이 ‘내가 있다’든, ‘나는 무엇인가?’든, ‘이 뭣고?’든)에 모으면 마음의 움직임을 가능케 하는 바탕인 의식과 만날 수 있는데, 그대가 확실하게 의식과 만나고 나면, 마음이란 결국 의식이 있음으로 해서 가능한 움직임일 뿐임을 명확하게 알게 된다. 그때 그대의 관심이 비로소 마음에서 의식으로 옮겨가게 되는 것이다.--- p.42 「spectrum 01 내가 있다는 느낌을 쫓아서」
깨달음이 하나뿐이니 깨달은 사람들은 다 똑같이 행동할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정치인들이 정치라는 한 가지 일에 종사하지만 그 개인에 있어서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고, 택시 기사들도 똑같은 일을 하지만 각자 다 삶의 모습이 다르듯이, 깨달음에 있어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나타난다. 그래서 혹자는 고요한 곳을 찾아들어가서 침묵을 즐기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망나니로 변신하기도 한다. ‘나’라고 할 것이 없으니 더 이상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나’라고 할 것이 없으니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p.56 「spectrum 02 삶속에서 죽음을 죽음 속에서 삶을」
어쩌면 마음을 보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그렇게나 많은 방편들이 생겨났을까? 마음을 보면 되는데 왜 잠을 안 자는가? 마음을 보면 되는데 왜 밥을 안 먹는가? 마음을 보면 되는데 왜 고행을 하는가? 마하리쉬는 모든 방법들이 다 참자아 탐구로 들어가기 위한 간접적인 방편들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참자아 탐구가 바로 마음을 보는 것이다. 단식도, 장좌불와도, 고행도 다 마음을 보기 위한 준비운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마음을 봐라!--- p.73 「spectrum 03 자아탐구와 헌신의 길」
물 같은 사람이 되라. 도덕경은 결국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써진 글이다. 지는 것이 결국 이기는 것이고 남을 돕는 것이 결국엔 나를 돕는 일이 된다는 걸 그대도 알고 있지만, 막상 행동을 할 땐 그게 잘 안 된다. 그대가 의식의 눈으로도 보고 마음의 눈으로도 보면서 갈등하는데 대개는 마음이 의식을 이기는 탓이다. 하지만 의식이 성장하면 의식의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마음은 여전히 움직이지만 의식을 압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매일 이를 닦고 몸을 씻듯이 마음도 좀 씻고 다녀라.--- p.79 「spectrum 04 물처럼 흘러서」
벽에 문이 있으면 그 문을 열고 지나가면 된다. 그런데 만약 문이 없다면 어떻게 지나갈 수 있을까? 정상적으로는 벽을 지나서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그대가 모르는 마술 같은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벽을 지나서 반대편으로 넘어가려던 그대의 ‘나’가 사라지는 순간 모든 것이 ‘나’가 되는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그저 어떻게든 이 몸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야한다고 믿고 있던 그대가 그 믿음을 포기하는 순간, 그대가 모든 곳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굳이 벽을 지날 필요도 없고 저쪽으로 건너갈 필요도 없어지는 것이다. 결국 그대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는 셈이다. 그대의 ‘나’를 없앨 수 있다는 것과 그대가 사라지는 순간 그대가 전부가 된다는 것을. 그대의 앞길을 막고 있는 것은 사실은 아무 것도 없다. 그대가 스스로 자신을 묶어놓고 있을 뿐이다.--- p.85 「spectrum 04 물처럼 흘러서」
흔히들 붓다(깨달은 사람)를 얘기할 때 공자는 잘 언급하지 않는데, 내가 보기엔 공자만큼 확실하게 깨달은 사람도 별로 많지 않다. 삶과 죽음을 두루 통달한 사람이 붓다가 아니라면 누가 붓다란 말인가? 불교 쪽에서 보기엔 공자가 그저 ‘삶의 스승’ 정도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수행을 통해서 공자처럼 되려면 갈 길이 멀고도 멀기 때문이다. 공자는 석가모니나 노자와 견주어도 하등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이다. 깨달음이 어찌 투명함에만 있겠는가? 세상을 다 받아들이고도 흔적이 없으니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p.93 「spectrum 05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
공자가 충을 말하고 예를 말하고 믿음을 말하고 배움을 말하니까, 얼핏 공자가 생활에 매여 있는 듯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보다시피 공자는 생사를 훌쩍 벗어나 있다. 깨달았다고 해서 삶을 떠나야 한다는 법은 이 우주 어디에도 없다. 이 우주 전부가 깨달음이기 때문에.--- p.112 「spectrum 05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
석가모니가 진리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석가모니는 진리를 ‘이것도 아니고, 이것이 아님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진리의 공식은 오직 이것 하나 밖에 없다. 진리는 항상 ‘둘 다’다. 그래서 ‘하나’다. 이걸 알아야 그대가 미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대는 항상 ‘여기’서 벗어나려하고, ‘저기’로 가려고 한다. 여기와 저기가 다르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착각이다. 여기와 저기는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의 벗어나려는 움직임과 향해가려는 움직임이 바로 그대의 미망이다. 움직일 필요가 전혀 없는데, 그대가 자신의 착각에 속아서 자꾸 움직이려하고, 또 움직이기 때문에 그대가 끝없이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p.130 「spectrum 06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바르돈은 다스칼로스와 함께 마법을 대표하는 붓다다. 세상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 마법을 통해서 존재를 안 사람도 있을 법하지 않은가? 마법이라는 흔치 않은 방법을 통했음에도 바르돈과 다스칼로스는 완벽한 붓다의 면모를 보여준다. 오용의 위험이 큰 마법을 통제해서 선용하는 실례를 세상에 보여준 것이다. 수행이라고 하면 얼른 명상, 위빠사나, 만트라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가? 이 세상에 수행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부디 편견 없이 방법을 사용해라.--- p.147 「spectrum 07 마법을 통해 가는 길」
운동역학의 원리는 한마디로 ‘멘탈체로 감각하기’다. 인간의 몸은 육체 안에 아스트랄체(마음의 몸)가 있고 또 그 안에 멘탈체(의식의 몸)가 있는데, 멘탈체는 멘탈체 고유의 감각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 감각의 기능을 진짜, 가짜 판별에 사용한 것이 곧 운동역학이다. 운동역학은 왜 어린 아이를 통해서 의식 수준을 측정하는가? 어린 아이는 아직 육체와 아스트랄체가 성숙하지 않은 상태라서 멘탈체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 그래서 어린 아이는 ‘멘탈체 감각’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성장해서 어른이 되면, 멘탈체 위에 아스트랄체가 덮이게 되고 거기에 육체의 습관까지 쌓이게 돼서 멘탈체가 깊은 곳에 묻히게 된다. 그래서 어른은 운동역학 측정에 적합지 않다.--- p.191 「spectrum 09 의식의 지도를 그리다」
고통이 아닌 것을 고통으로 둔갑시키는 판단은 어디서 온 것인가? 판단은 결국 그대의 첫 번째 생각으로부터 온다. 그대의 첫 번째 생각이 무엇일까? ‘이 몸과 마음이 곧 나’라는 생각이다. 그대가 어떤 영역을 존재로부터 떼서 ‘나’로 설정했기 때문에 그 후로는 그 ‘나’를 보호할 의무가 생기게 되고, 그 때문에 나를 위한 판단이 반복되게 되고 어느새 나를 위한 판단이 습관으로 자리 잡고, 바로 그 습관으로 자리 잡은 판단이 고통이 아닌 것을 고통으로 둔갑시킨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판단을 없애려면 판단의 뿌리인 ‘나’를 없애야한다. 이 몸과 마음을 나로 설정하는 게 과연 올바른 판단인지를 면밀히 조사해서 ‘나’의 허구성을 깊게 이해해야 한다. 지금 고통스러운가? 그렇다면 그대가 판단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판단을 있게 하는 원인인 ‘나’를 조사해서 이 우주 전부가 다 ‘나’임을 이해해라. 그러면 먼저 판단이 사라지고 뒤이어서 고통이 사라진다. ‘나’가 없으면 고통도 없다.--- p.215 「spectrum 10 가슴으로 만난 신」
어딘가로 찾아 나서지 마라. 기적은 어느 곳에 있을까? 천국이 있는 곳은 어느 방향일까? 예수님을 향해 갈까 부처님을 향해 갈까? 나는 지금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 모든 것은 다 그대의 마음속에 있다. 그대가 돈을 주고 영화관에 가는 것은 필름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면에 비쳐 보이는 화려한 영상을 보기 위해서이지만, 그 영상들이 사실은 다 필름에 담겨진 그림의 반영일 뿐인 것과 똑같다.--- p.232 「spectrum 11 마음을 완전하게 사용하는 사람들」
그대가 죽고자 한다고 해서 죽어지는 것도 아니고, 살고자 한다고 해서 더 살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내 삶이 오래 갈까 혹은 짧을까, 내 삶이 행복할까 혹은 불행할까, 혹은 행복이 언제까지 이어질까를 염려하지 말고 맘껏 살면 된다. 떠나는 사람은 떠날 때가 되서 떠나는 것이고, 아픈 사람은 아플 이유가 있어서 아픈 것이고, 즐기는 사람은 즐길만해서 즐기는 것이다. 삶에 휘둘리지 말고, 삶을 사용해라.--- p.286 「spectrum 13 우리가 지구에 온 이유·미리 계획된 삶」
무묘앙 에오는 이 책에서 언급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중생이지만 현실적으로 에오를 뛰어난 각자覺者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탓에, 에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 굳이 언급했다. 무묘앙 에오 같은 의식 상태는 깨달음을 향해 가는 수행자라면 누구나 겪는 상태다. 하지만 신실한 수행자는 냉철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그 고비를 넘어간다. 하지만 에오는 그냥 주저앉아 버렸다. 에오의 수행은 얕았고 성질은 급했던 탓이다. 독특하면 눈에는 띄게 마련이지만 언젠가는 사실이 밝혀진다. 미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하는 수행에서 다시 미망에 빠지지 마라. 가련한 바보는 에오 하나로 충분하다.--- p.307 「spectrum 15 미처 못가고 옆길로 샌 바보」
존재와 현실을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하이데거는 의식을 버리고 현실을 택했다. 그렇다면 이제 현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남았다. 하이데거는 어디로 가게 될까? 하이데거는 후설의 정반대편으로 나가고자 한다. 후설은 현실로부터 정신으로 물러나고, 다시 정신으로부터 의식으로 물러나서 ‘순수의식’이야말로 실체라고 선언했었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후설이 물러났던 이 길을 하나씩 되짚어 나온다.--- p.327 「spectrum 16 서양의 철학자들」
언어는 어디에서 왔는가? 언어는 생각을 드러낼 필요 때문에 생겨났다. 그렇다면 생각은 어디서 왔는가? 생각은 차이(다름)를 인식하면서부터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럼 차이(다름)는 언제부터 생겨났는가? (에덴동산에서 이브가 사과를 따먹는 순간 생겨났다.^^) 존재가 하나로 있을 때는 생각도 없었다. 하나는 어디에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생각이라는 활동이 처리할 재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라는 놈이 생겨나면서 차이(다름)를 인식하게 된다. 창세기에 나오는 ‘너희 눈이 밝아져서…’라는 구절이 바로 이 생각의 탄생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이야기이다.--- p.339 「spectrum 16 서양의 철학자들」
흄과 칸트가 이성을 보는 관점이 다른 것도 똑같은 이유에서다. 이성은 ‘나’를 끌고 갈 수 있는 추진력을 갖는 대신, ‘나’의 외부를 주관적으로 해석한다는 단점도 갖고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흄과 칸트가 갈린다. 흄에게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때문에 흄에게는 주관적인 이성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반면에 칸트는 자아의 통일성과 추진력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칸트는 어떻게든 이성을 옹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은 보는 사람의 성향의 문제이다.--- p.351 「spectrum 16 서양의 철학자들」
석가모니는 존재의 근원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석가모니에게는 선도 없고 악도 없고 우연도 없고 필연도 없다. 어차피 모양들은 다 허깨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는 존재의 모양들 속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다. 때문에 예수는 선과 악, 우연과 필연을 직접 만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존재의 모양들이 우연과 필연의 소용돌이 속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가룟 유다가 벌을 받고 욕을 먹는 것은 필연이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는 그럴만한 짓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가룟 유다가 선택됐는가? 그건 우연이다. 그렇다면 우연히 선택되어서 악역이 된 가룟 유다의 불행은 누가 보상해주는가? 우연을 납득시킬 수 있는 메커니즘이 존재하는가? 물론, 있다.--- p.367 「spectrum 17 그리스도가 된 예수」
이제 예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판례는 이미 나와 있다. 하던 대로 해라! 나는 그 여자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해버리면 깔끔하다. 하지만 그래서야 어찌 기적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예수가 한낱 선생이었다면 그는 한 쪽을 택했을 것이다. 죄를 지었으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한다는 쪽을 택하거나, 죄는 밉지만 인정상 한 번쯤 눈감아주라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를 보라. 예수는 이쪽도 택하지 않고, 저쪽도 택하지 않는다. 예수는 ‘죄를 벌로 갚으려는 그대는 과연 누구인가?’하고 묻는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난다. 여자도 죽고 중생들도 죽고 예수도 몰락할 상황에서, 모두가 함께 살아나는 기적 같은 반전이 일어난다. 예수는 눈앞의 어려움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기적을 행하는 완벽한 붓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적으로 가는 방법은 오직 사랑 밖에 없다. 예수의 사랑을 보라. 기독교여….--- p.389 「spectrum 17 그리스도가 된 예수」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라는 탁월한 기록이 없었다면, 도마복음에서라도 예수의 뜻을 뽑아내야겠지만, 예수의 육성과 뜻은 이미 신약성경에 충분히 드러나 있다. 그래서 ‘도마복음’이라는 멍청한 기록에 연연할 필요가 전혀 없다. 옛사람도 지금 사람들처럼 멍청이였고, 사기꾼이었고, 게으름뱅이였다. 그러니 오래된 문서라고 해서 뭔가 깊은 뜻을 담고 있겠거니 하는 착각은 버려라. 예수의 뜻은 명확하고, 도마는 명백히 바보다.
--- p.488 「부록 도마복음·바보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