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전쟁의 발발은 몇 년 이전에는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을 국민적 단합의식을 낳았다. 공통의 숙명에 대한 믿음이 가장자리에서 주류로 이동되었다. ‘전쟁 노력(war effort)’이 모든 종류의 통상적인 일상활동을 흡수하게 되었다. 다른 어떤 것만큼이나 이러한 평범한 차원도 전쟁에 뚜렷한 특징을 제공했으며, 그것을 최초의 ‘총력전’으로 변모시켰다.
20세기 총력전은 그 정신이 아니라 규모 면에서 프랑스의 혁명전쟁과 달랐다. 변화된 것은 전체 인민을 동원하려는 국가의 의지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들의 조직적 능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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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8년의 베스트팔렌 평화조약 제118조에 의해 신성 로마(Holy Roman) 제국의 모든 군주들은 ‘자신의 안보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만큼의 병력을 자신의 영토에 유지할 수 있게’ 허용되었다. 결국 군사적인 변화가 16세기 초에 개시되었던 국가행정의 발전을 재촉했다. 자신의 국가를 중앙집권화하고 통일하려는 유럽 통치자들의 투쟁은 개별 귀족이나 사업가는 더 이상 전투의 장에서 군주에게 도전할 수 없음―프랑스 종교전쟁, 프롱드의 난(Frondes), 영국 내전은 귀족이 행한 최후의 진중한 발악이었다―을 의미했던 전쟁비용의 증가에 의해 도움을 받았으며, ‘폭력의 독점’은 왕에게로 넘어갔다. 17세기 중반과 후반 몇십 년 동안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러시아, 이탈리아와 독일의 국가들1)은 국가를 통치하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개인화된 군주정의 부상을 목도했다. 중앙집권적 권력의 증가와 관료제에 직면해 지방의 특권과 독점권은 꾸준히 감소했다. 이러한 과정의 주요단계 중 하나는 상비군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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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에서 18세기의 전쟁은 유럽 열강에 의해 지배되었지만, 지상에서는 그들이 여러 중요한 군사국가 중 하나의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기술적·조직적 맥락에서 보았을 때는 지상이나 해상에서의 전쟁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사회적 맥락에서 가장 심대한 발전은 1775~1783년의 미국 독립전쟁이었는데, 이는 잠재적으로 주요한 신생국가의 탄생을 가져온 성공적인 대중투쟁이었다. 주도적인 열강은 해상에서는 영국, 지상에서는 중국과 러시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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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이전에 군역은 소수 프랑스 남성의 쓰라린 운명이었다. 그러나 1794년 이후 그것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신체 건강한 모든 남성 시민의 의무가 되었다. 혁명은 시민의 시민권과 그들의 군사적 책임 간의 분명한 연관성을 확립했다. 시민은 국가가 그들에게 보장하는 정치적 권리와 자유에 대한 답례로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필요하다면 죽어야 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군에서 복무하는 것이 모든 시민의 의무라면, 각 개인은 사병이라는 천한 계급에서 장군이라는 탁월한 지위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된 것이었다. 여태까지는 대개 귀족과 젠트리의 전유물이었던 장교단 입단의 기회가 유능하고 용기 있는 평민에게도 개방되었다. 그 결과는 1794년과 1812년 간 프랑스 군대가 달성했던 믿기 힘든 일련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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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전역에 산업화가 확산된 덕택에 무기들은 1914년 이전 반세기 동안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발전했으며, 그런 과정에서 이것들은 전장을 변형시켰다. 무연화약을 사용하며 수동식 노리쇠를 갖춘 연발총, 속사포, 기관총은 1815년의 전술과, 더 나아가서는 군복이 100년 뒤에는 자살행위와 같은 것이 될 것임을 의미했다. 19세기 전반기의 밝은 색상 군복은 회색과 갈색의 칙칙한 위장복으로 대체되었지만, 무기들의 사거리와 증대되는 치사성은 전술가들을 풀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문제에 직면하게 했다. 밀집대형을 갖춰 진격하는 보병은 전멸당할 것이었다. (중간 생략) 장병들의 사기가 충분하면 보병은 성공적인 착검돌격(bayonet charge)으로 절정에 도달할 수 있었다. 유럽 군대 대부분이 도출했던 교훈은 승리는 병사들이 죽음을 경멸하기까지 극기심에 충만한 측에 돌아갈 것이라는 점이었다. 1905년 영국의 한 군사 저술가는 “전적으로 승리의 기회는 나머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기회를 획득하기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이들의 자기 희생이 충만한 진영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썼다. --- p.121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치러진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난 뒤 대중정치와 대량생산 시대에 전쟁은 병사나 민간인이나 할 것 없이 전체 주민 간에 수행되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가정이 존재했다. 대립하는 군사력 간의 짧은 전역으로 치러지는 재래식 전쟁에 대한 개념은 ‘총력전’의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이 용어는 1918년에 독일의 제1병참감(First Generalquartiermeister)1)인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머지않아 국제적으로 통용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총력전은 전쟁에 대한 전통적 이론으로부터의 혁명적인 이탈이었다. 총력전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는 국민의 모든 물질적·지적·정신적 에너지를 동원해야 했다. 암암리에 적의 공동체 전체―과학자, 노동자, 농민―가 합법적인 전쟁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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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게도 1939년에서 1945년까지 총력전 수행을 위한 노력은 총력전이 군사력에 의해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싸우는 전쟁의 전통으로 회귀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했다. 종전기에 개발된 새로운 세대의 무기는 너무나 고비용적이고 기술적으로 정교해 기존의 민간산업으로는 신속하게 대량생산할 수 없었다. 도시의 민간 주민들을 표적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는 국가자원을 동원하기에는 너무 짧은 72시간 내에 분쟁이 끝나버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대규모적인 참가로 달성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이는 대규모 시민군, 효과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 국내의 민간자원에 의존하는 것, 재래식 전쟁에서 행해진 민간인 공격을 싫어했던 군부의 많은 이들이 환영하는 결론이었다. 1945년 이후 군사기술의 성격, 전쟁 수행에 대한 국제적 규칙을 강화하려는 노력, 전쟁의 경제적 토대를 제공하기 위한 ‘군산 복합체’의 창설은 하나같이 1918년 이후 한 세대 동안 전략적 사고를 지배했던 총력전 개념을 손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 p.196~197
1945년 이후 많은 선진국가들의 국방부는 기술 혁신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으며, 그들은 비단 군사적 장치뿐 아니라 이른바 ‘파급(spin-off)’효과1)를 통해 민간기술을 만들어내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특히 1970년 이후에는 세계 도처의 점점 더 많은 소규모 개발 도상국이 강대국을 모방하고자 했으며, 독자적으로 군사 연구개발 프로그램을 개시했다. 하지만 그것은 늘 매우 막대한 경제적 비용을 소비했던 데 반해 가시적인 ‘국방’상의 유익을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떠나 인식이란 그 자체가 강력한 사회적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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