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누구냐는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벌어진 앞섶 사이로 새빨간 보석이 박힌 가슴이 살짝 드러났다 사라졌다.
“홍황…….”
이파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다가온 남자는 바로 짐승의 왕, 홍황이었다.
--- p.5
“내 것이 된 이상 더는 울게 하지 않아요, 신부님.”
홍황의 아찔한 속삭임이 바람을 타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녀를 바라는 홍황의 열 오른 눈빛이 하늘 위에서도 이파를 따끈하게 달구었다.
“신부님, 약속해주세요.”
하늘을 길게 그어 내리던 붉은 궤적은 어느새 말끔하게 사라지고, 검은 날개가 만드는 그림자만이 유일한 가운데 홍황이 엄숙하게 말했다.
“그대는 홍비로 죽는 겁니다.”
--- p.9
이미 결정이 난 것이라는 것을 이파는 알고 있었다. 그 어떤 발악도 통하 지 않으리라. 그러나 이파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었다. 이치 무, 제 아비가 혼례를 올리라고 하는 이는 ‘홍황’. 바로 사람이 아닌 수인의 왕이기 때문이었다.
홍황의 신부는 말뿐인 제물이었다. 홍황이 데려간 신부는 두 번 다시 돌 아오지 않았다. 잡아먹혔다는 말도 있고, 심장을 뺏겼다는 말도 있지만, 뭐 가 됐건 무서운 것들뿐이었다.
“제발, 제발…….”
--- p.11
“피는 안 돼요, 성가신 것들이 꼬여든다고요.”
내리뜬 눈이 가늘게 그려낸 초승달을 닮았다.
“그대의 피를 마시고, 이 달콤한 살을 찢어 먹고 싶어 하는 것들이 있어요.”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는 야릇한 목소리가 귓가를 핥는 것 같았다.
“그러니 신부님, 앞으로는 나를 물어요.”
홍황이 이파의 타액이 묻은 손가락을 핥아 올리며 권태로운 표정을 지었다.
--- p.18
이제 움켜쥔 온기. 처음으로 탐이 나는 사내.
이파는 ‘욕심’을 부려 보기로 했다. 감히. 그를, 그의 평생을 이파가 모조리 가지기로.
그러기 위해서는 반수가 아니라 그 어떤 것이 그녀를 방해한다 해도 절대 꺾이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귓가를 울리는 홍황의 미성에 이파는 가슴이 터질 것같이 빠듯하게 부풀어 올랐다.
--- p.36
“이러다가 제가 홍황의 자리를 물려주는 날 아쉬워하면 어쩌지요?”
이파는 저와의 미래를 그리며 기꺼워하는 사내의 목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목덜미를 스치는 그의 날숨이 불어넣는 묘한 온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실린 진심에 온몸이 간질거리고 가슴이 설레 견디기 힘들었다.
“정말로 배, 백 년 뒤에도 이러실지 두고 보겠어요.”
기대를 담아 새침하게 대꾸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부디.”
--- p.52P
“그러면, 반수가 되면…….”
“신부님의 피를 마시면 돌아올 수 있어요.”
이파가 말하려던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반수는 누군가의 자라지 못한 아이였던 거니?
암담한 진실을 읊는 아이를 두고 이파가 입 안으로 삼킨 말은 그것이었다.
“걱정 마세요. 전 새 중의 새, 물총새니까요. 멋진 성체가 될 거예요.”
가슴을 내밀고 뻐기듯이 말하는 오후의 말에 이파는 목이 메어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p.56
“어떻게 먹여드린 줄 아시고?”
“네?”
손안에 든 사랑스러운 것이 속눈썹을 팔랑이며 ‘네?’ 하고 되묻는다. 나비 날갯짓처럼 가볍게 팔랑인 것은 그의 가슴 끝에 닿아 있었던가. 닿을 리 없는 심장이 몹시 간질거리며 짜릿함이 사지로 번개처럼 내달렸다.
“이렇게…….”
고개를 비틀어 내리자 움찔 떠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는 천천히 이파의 입술을 자신에게 겹쳤다. 그 언젠가 날아갈 것 같은 짧은 입맞춤과는 다르다고 시위라도 하듯, 느리고도, 야릇하게. 따끈한 숨이 뒤섞이도록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말캉한 붉은 살을 힘줘 뭉개고 달게 삼켰다.
--- p.65
“한 달이에요. 사슴처럼 달릴 거고. 두 달이에요. 헤엄을 칠 거예요.”
맹추같이 잠드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에요.
이파는 눈을 감고서 홍황에게 조곤조곤한 말투로 자신의 미래를 들려주었다.
“신부님.”
“더 배워야 할 게 있다면, 더 배울 거예요. 전 홍비가 되고 말 거예요.”
이파는 자신을 부르는 홍황을 향해 대답 대신 다짐을 들려주었다.
--- p.65
눈앞에 있는 것은 거대한 짐승이었다.
팔뚝이 길게 찢어진 짐승은 흘러내리는 이파의 피를 보며 낮게 울었다.
크르르르르―.
빗물에 젖은 회색의 살이 번들거렸다.
아니, 번들거리던 것은 불을 뿜을 것 같은 노란 눈이었을까.
오금이 저리도록 징그럽고 무서운 모습에 절로 숨이 막혔다.
“바, 반수…….”
--- p.74
“전 죽지 않아요.”
이파는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늘처럼 구하러 와주실 때까지 끝까지 살아남을 거예요.
“보세요, 전 낮에 공격당한 최초의 신부이지만 살아 있잖아요.”
죽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반드시 절 살리러 달려와주세요.
쉼 없이 속삭이는 이파의 입 안에서도 단 한마디는 결국 소리가 되지 못하고 한숨으로 흩어버렸다.
……슬퍼하지 마세요.
--- p.82
“단 한 방울, 반수를 수인으로 돌리는 데는 단 한 방울의 신부의 피면 충분합니다. 많이도 필요 없어요.”
홍황은 손가락으로 이파의 입술을 뭉개듯 쓸었다.
“그러나 신부의 다디단 피를 맛본 짐승은 결코 그걸로 만족하지 못해요. 단 한 방울의 피와 새날의 햇살이면 이 저주를 끝낼 수 있지만 자제력이 없는 녀석들은 기어이 신부를 갈가리 찢어 먹어버리죠. 그리고 신부를 죽임으로써 결국 구원도 받지 못합니다.”
--- p.93
하늘 아래, 이 명이 허락하는 한 이파의 하나뿐인 마음붙이, 홍황.
그가 돌아선다면, 이파는 살 수 없었다.
이파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온기를 맛보았고, 귀여움 받는 기쁨을 알았다.
사랑받고, 사랑했다.
더없이 사랑하는 이가 바로 그였다.
--- p.107
항상 그랬듯이 홍황은 가만히 눈을 감으며 고통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참고 견디는 것 외에는 그는 몰랐다.
이 꿈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구태여 되짚어 보지 않을 셈이었다.
신부를 빼앗기고 수인족이 멸족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왕의 두려움도,
목숨을 나눠 받은 차랑을 적으로 등지고 서로를 노리고 있다는 피붙이의 참담함도,
그보다도 처절하게 신부를 원하는 애달픈 이 마음까지도.
오늘은 눈감을 것이다.
--- p.188
홍황은 천천히 눈을 끔뻑이며, 그새 또 성장한 자신의 신부를 바라보았다.
또 자랐다. 신부님은 오늘 또 자라서 그의 앞에 섰다. 이곳에 발을 디딘 첫날보다, 그리고 비 오던 날보다. 그리고 오늘 아침보다. 훌쩍 자라 열심히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홍황은 이번에도 자신이 신부에게 졌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한 번도 이겨본 적 없었지만, 앞으로도 평생 신부님께 이길 수 없으리란 것도 안다.
--- p.195
[2권]
일평생 그대만 은애할 것입니다.
아껴 줄 것입니다.
검은 기러기는 평생에 한 번 짝을 맞는답니다.
어느새 홍황은 이파에게 고개를 기울여 더없이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의 신부가 되어주세요.”
--- p.569
이파는 그간의 아쉬움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그를 몇 번이고 불렀다.
“치언.”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치언―.”
그를 부르는 저 다디단 목소리에 심장이 뻐근하리만큼 기뻐서.
“치언―.”
홍황은 자신을 부르고 또 부르는 이파를 더는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 p.5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