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여느 동물과 달리 문화생활을 할 수 있었던 원천은 도구의 제작과 이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득한 옛날 문자 기록을 남기지 않은 시기에 있어서 인류의 생활 모습을 이해하는 데는 생활 도구(유물)나 그 주변 흔적(유적)이 중요한 추정 자료가 된다.
문자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유물과 유적에 의해 당시의 생활상을 추정하여 이해하는 시대를 선사 시대라 한다. 선사 시대는 흔히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로 발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는 석기를 가공하는 기술 수준을 두고 구분한 것이나 대체로 농사를 지으며 한 곳에 머물러 사는지 아닌지에 따라 두 시대가 구분되며, 청동기와 철기 시대는 청동기와 철기의 제작과 이용을 두고 구분한 것이지만 계급 사회의 출현과 국가의 형성을 각각 특징으로 드러내는 시대로 갈라볼 수 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한반도 전체를 통틀어서도 구석기 유적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그 이후 한반도 곳곳에서 구석기 유적이 확인되면서 이제는 한반도 내의 구석기 유적지가 수십 군데에 달한다. 오늘날의 진주 지역에서도 대평면 내촌리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굴됨으로써 진주 지역에도 아득히 먼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내촌리 유적에서는 사람 손으로 가공한 흔적이 보이는 석기를 일백 수십 점이나 찾아내었다. 이들 석기는 가공의 정도가 매우 미미할 뿐 아니라 대부분이 찍개류나 긁개류의 석기이고, 구석기 시대 후기의 대표 석기인 돌날(blade)이 보이지 않아 중기 이전에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진주에서는 이 밖에 대곡면 마진리, 지수면 청계리 임계마을 일대에서도 구석기 유적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 유적을 통해서 진주 지역에 처음 사람이 살았던 시기가 수십만 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동물을 기르거나 식량을 생산하는 법을 알지 못하였다. 유치하나마 도구를 사용하여 식량 자원을 얻고 불을 사용할 줄 알았다는 점에서 여느 동물의 생활과는 달랐으나 생활 모습 자체는 동물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이들은 한 떼의 동물처럼 무리를 지어 살면서 기후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떠돌아다녔다. 그러므로 이들은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에 진주 지역에 들어와 정착해 살았던 사람들과는 혈연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진주 지역에 머물며 모여서 부족 사회를 이루고 살았던 진주 지역 정착민의 모습은 신석기 유적에서 찾아야 한다.
진주 지역 신석기 유적은 대평면 상촌리, 대곡면 마진리, 수곡면 원당, 금곡면 엄정리 등 여러 곳이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상촌리 유적에서는 20여 채의 집터와 100여 개의 크고 작은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이들 집터 중에는 2~3명 정도가 생활할 수 있는 작은 집터도 있으나, 대체로 여남은 사람이 생활할 만한 큰 규모의 집터가 많다. 어떤 집터에서는 가장자리에 큰 빗살무늬 토기를 세워놓고 여기에 죽은 사람을 화장한 뒤 남은 뼈를 모아서 묻어 놓은 것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토기 안에 사람을 매장한 사례는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의 매장 풍습으로는 달리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한다.
상촌리 유적에서는 여러 형태의 다양한 토기가 발견되었다. 아가리부터 밑바닥까지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려 넣은 것에서부터 밑바닥이나 몸체에는 무늬가 없고 아가리 부분에만 무늬를 넣은 것, 붉은 빛깔을 입힌 것 등이 보인다. 토기에 그려진 무늬에는 점열문, 짧은 빗금무늬, 생선 뼈 무늬, 비스듬한 문살무늬, 세모꼴 무늬 같은 것들이 보인다. 석기로는 돌도끼, 갈돌, 숫돌, 보습 꼴 석기, 돌창, 돌화살촉 등이 발견되었다.
상촌리 유적은 토기의 형태나 무늬를 살펴볼 때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중기(기원전 3500~2000년)와 후기(기원전 2000~1000년)에 해당하는 것이다. 신석기 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데 이는 같은 시기 남해안 일대의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는 신석기 유물과 비슷한 특색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평면 상촌리 유적을 남긴 주민은 대체로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중·후기의 어느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진주 지역의 신석기 유적은 이 밖에도 대곡면 마진리, 수곡면 원당리, 금곡면 엄정리 등지의 유적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유적지가 자리 잡은 곳은 진주 도심 지역이 아닌 외곽 지역의 강변이나 야산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진주에서는 1995년부터 1999년까지 진행한 남강댐 확장 공사로 인근의 수몰 예정 지역에 대한 대규모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선사시대 전 시기에 걸친 다양한 유적과 유물을 조사한 바 있다. 그들 가운데서도 크게 눈길을 끌었던 것은 대평리의 청동기 유적이었다. 대평 유적의 발굴은 전체 유적지의 극히 일부분에 대해서만 이루어졌지만, 큰 규모의 밭과 마을, 마을의 방어와 경계를 담당하는 시설인 환호(빙 둘러 깊이 파고 물을 채워 놓은 도랑), 무려 400동이 넘는 집터, 수많은 야외 작업장과 화덕 자리, 그릇을 굽는 가마, 먹거리를 저장하는 구덩이, 무덤 등 여러 가지 구조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 구조물은 주거 지역과 경작지, 매장 지역으로 구분되는 공간 속에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당시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우선 대규모의 밭과 수백 채의 집터 유적을 통해서 볼 때, 강변에 쌓인 모래흙으로 이루어진 넓은 충적지(큰물에 떠내려온 풋나무와 흙탕이 쌓여서 이루어진 땅)에서 밭농사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먹고 남은 먹거리를 따로 비축할 수 있을 정도로 제법 넉넉하고 안정된 사회를 이루고 살았으며, 인구가 늘어나면서 주변 일대에서는 가장 큰 마을을 이루었고, 근처에서 나오는 옥돌로 장신구를 만들어 쓰는 따위 수공업도 발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공동체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방책으로 만들어진 ‘환호’와 같은 큰 규모의 방어 시설은 많은 노동력과 상당한 수준의 토목 기술이 뒷받침되었음을 알려주며, 한편으로는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조직화된 계급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대평리의 여러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는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정작 청동 유물은 한 점의 굽은 옥 모양 제품뿐이고 대다수는 토기와 석기, 구슬로 된 장신구들이다. 그런데도 대평리의 이들 유적을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판단하는 까닭은 이들 유적지의 유물이 우리나라의 다른 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유물과 함께 나오기 때문이다.
청동기 시대는 청동기의 사용과 더불어 생산 경제가 더욱 발전하고 전문적 분업이 이루어지면서 사유 재산 제도와 지배 계급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시대이다. 청동기 시대에 나타나는 최초의 계급사회는 흔히 족장사회(군장사회)로 일컬어진다. 대평리 유적에서 나타나는 큰 규모의 밭과 마을, 마을의 방어와 경계를 담당하는 시설인 환호, 수백 동의 집터와 고인돌은 이러한 족장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족장사회는 핏줄을 바탕으로 하고 지역 공동체를 터전으로 하는 점에서 부족사회와 다를 바 없으나, 족장이 지배하는 계급사회라는 점에서 부족사회에서 한 단계 나아간 사회라 할 수 있다. 족장과 그의 가족의 무덤인 고인돌이나 주거지 주위에 설치한 방어 시설인 환호는 청동기시대 계급사회의 모습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진주 대평리 유적은 이 같은 계급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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