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엔 네가 전화를 걸어 이런 말을 하기도 했었지.?여기 너처럼 옷 입은 사람이 많아. 너는 이국의 낯선 도시에 있었고 나는 너의 말을 듣고는 쿡 쿡 웃었다. 내가 어떻게 옷을 입는 사람인지 네가 인지하고 있는 게 좋아서 웃었고, 네가 거리에 나와서 한 일이라는 게 사람들을 보며 나를 떠올린 것이라서 웃었다.
--- p.69, 임승유 「나만 알고 지내는 사람」
살겠다고 꾸역꾸역 돌아와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이를 닦다가 거울을 보는 나는 옷 입는 감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지만, 네가 했던 이런 말도 떠오른다. 넌 참 환하게 웃는다. 그래서 알았지. 내가 환하게 웃는 사람이라는 걸. 나는 너한테 무슨 말을 해줬을까. 내가 해준 그 말 때문에 너는 얼마큼 변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을까.
--- p.71, 임승유 「나만 알고 지내는 사람」
우리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똑같은 옷을 입고 외출을 할 때 마다 수치심을 느꼈다. 동네 사람들 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감내하며 매번 “너희는 쌍둥이니? 둘 중에 누가 언니니?”라는 질문을 들어야 했다. 어느 날, 참다못한 내가 따져 물었다. “엄마 왜 우리는 항상 똑같은 옷만 입어?”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너희 둘 중 하나를 잃어버리면 엄마가 너무 놀라서 경찰 아저씨한테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할 수 없잖아. 그래서 한 명을 잃어버리면 다른 한 명을 이렇게 보여주려고.” 그때 알았다. 우리는 자매도, 경진이도, 시진이도 아니었다. 서로의 거울이자 원 플러스 원이었으며 스페어타이어였다.
--- p.75, 이소호 「나와 너와 우리의 사전」
우리는 매 순간 치열하게 싸우고 협박했다. 싸운 뒤에는 서로의 방문을 열 때마다 각자의 방에 걸린 빈 행거를 보고 안심했다. 빈 행거는 우리에게 살아 있음의 상징이자 죽음의 상징이었다. 우리는 자매니까. 여전히 같은 꿈을 꾼다. 빈 행거에 목을 매는 그 꿈을 꾸고 서로에게 말을 건넨다. “똑똑히 들어. 내가 먼저 저 행거에 목을 매고 죽을 거야. 내가 죽으면 가장 먼저, 네가 나를 발견하게 될 거야.”
--- p.83, 이소호 「나와 너와 우리의 사전」
“우리의 삶은 뫼비우스의 띠, 고난인 동시에 경이다. 우리의 운명은 무한하며, 무한히 반복된다.” 고난인 동시에 경이인 삶, 이 둘이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면 이쪽과 저쪽을 오가야 하지만 이 쌍둥이 중에 경이는 에디의 몫이었고 고난은 에드워드의 몫이었다. 변치 않는 에드워드의 확신--- p.혼자지만 절대 외롭지 않다, 쌍둥이는 외로울 수 없다. 다른 쌍둥이 자아가 계속 존재하는 한. 뫼비우스 띠의 순환을 멈추는 방법은 띠를 끊는(순환할 수 없게) 방법뿐이다. 형제의 삶에서 그것은 죽음뿐이며 죽기 전까지 그들은 영원히 같은 날 생일을 맞고 서로를 기억하게 된다.
--- p.93, 이다혜 「하나 그리고 둘, 그리고 하나」
「World of Details」시리즈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두 세계를 연결한다. 나는 온라인 이미지로 본 뉴욕 거리의 실제 장소를 찾아다녔다. 먼저 온라인 공간에서 가상으로 뉴욕을 여행했고, 구글 스트리트뷰 아카이브에서 어떤 장면을 골랐다. 우연히 사진에 찍힌 보행자들에게 주목했는데, 특히 촬영되는 것을 알아채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보행자들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비록 얼굴은 알아볼 수 없도록 처리되었지만, 그들이 놀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세상이 언제나 촬영되고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목격자들이다. 오랫동안 그래왔지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카메라 뒤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 이미지들은 모두 자동차에 설치되어 주변을 촬영하도록 프로그램된 카메라가 찍은 것이다.
--- p.111, 빅토리아 빈슈톡 「월드 오브 티테일즈」
물론, 수많은 알레고리와 아예 노골적으로 삽입된 ‘깨달음’들이 『발리스』의 외부를 장악하고 있다. 많은 독자와 대부분의 전문가는 그 점을 들어 이 작품을 실패작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내면에는 마치 데카르트처럼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회의하는 고독한 인물의 초상이 담겨 있다. 그는 자신의 일부를 정신에서 격리시켜버릴 정도로 스스로를 의심하는 인물이며, 그와 동시에 아무도 믿지 않을 줄 알면서도 우주의 비밀을 탐구하기를 멈출 수 없는 사람이다. 이 작품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째서인지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다’고 말한 독자들은 대부분 이 점에 감응했던 것 같다.『발리스는 최고로 열렬한 모순이다. 딕은 돈키호테인 동시에 산초 판자였다. 혹은 예수이자 빌라도였다.
--- p.137, 최원호 「거대 활성 생체 지능 시스템 혹은 필립 K. 딕의 두 번째 인생」
워홀과 미젯이 정작 닮은 분야가 뭘까 묻는다면 나는 외모 대신 감정이라 말하고 싶다. 이는 단순히 연기 생활에서 터득한 퍼포먼스가 아니다. 깊게 영향받고 싶진 않지만 본인도 모르게 누군가의 영향권에 속해버린 사람에게 신비스레 체화된 무엇. 이제는 화가가 된 한 배우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사람이 지향했던 감정 상태와 닮아있다. 자신의 이미지가 퍼져나갈 자리에서 미젯은 워홀과의 에피소드를 일일이 떠벌리기보단, 예상치 못한 무뚝뚝함과 심드렁함으로 자신과 워홀의 관계를 설명해버리곤 했다. 워홀이 사망한 후 자신과 닮은 대스타가 죽었는데 어떤 생각이 드는가란 뻔한 질문에 그는 해석 가능한 예각을 내세운 예리함도, 애절함도 없는 반응을 보였다. 그의 말에서 표정을 확인하려는 이들을 향해 가급적 표정이 보이지 않도록 심심한 말을 건넸다.
--- p.144, 김신식 「영향과 영향권: 앨런 미젯과 앤디 워홀의 ‘더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