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순: 나에겐 충격이야. 조선 시대 여성이 이 정도로 남녀 사이의 사귐을 주도하는 작품이 있었다는 게.
--- p.19
캐순: 아렌트의 말이 맞는다면, ‘먹을거리’와 관계된 일을 직접적으로 하는 사람은 다 노예나 다름없겠네.
범식: 서양인들의 생각에 따른다면 그렇게 되겠네.
뭉술: 그러면 서양의 부자인 귀부인들은 뭐하고 살았지?
범식: 정치활동 같은 공적인 일은 허용이 안 되었고, 집안일은 노예나 하녀들이 하는 일이어야 했으니 말이야.
캐순: 아, 이제 입센이 지은 『인형의 집』이 이해된다. 왜 ‘노라’가 인형으로 있거나, 성적인 대상으로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이야.
--- p.31
뭉술: “그대 의심치 말길. 어두워지면 만나리.” 최랑, 멋있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자기의 선택을 믿고서 밀고 나가다니.
캐순: 그런데도 이생은 ‘머리카락이 설’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어. 얘는 왜 이렇게 담대하지 못하지?
범식: 그래도 최랑의 말을 따라 담장을 넘었잖아?
뭉술: 담을 넘었으면 넘은 태가 나야지. 아직도 담 틈으로 엿보는 것 같잖아?
캐순: 그래서 제목이 “이생규장전(이생이 담장 너머를 엿보다:”인가보다.
--- p.48
범식: 현실적인 잣대를 중시하는 이생에 반해, 최랑은 자기 자신의 느낌과 감성을 최우선시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캐릭터야. 함께 어울리기가 쉽지 않아.
....
캐순: 이 소설의 작가인 김시습은 세상을 이생과 같은 인생관을 가진 사람과 최랑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으로 나눠 본 것인가?
--- p.58~59
우주(宇宙)의 ‘우’는 공간을 뜻하고, ‘주’는 시간을 뜻해요. ...『설문해자주』에 다음처럼 나오거든요. ‘위아래와 사방을 ’우‘라하고, 과거현재미래를 ’주‘라 한다“
--- p.76
범식: 두 그림에서 시간과 공간의 속성을 좀더 밝혀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공간이 광활함과 장대함을 느끼게 한다면, 시간은 유장함과 깊이를 느끼게 한다는 식으로 말이야.
캐순: 시간이 깊이를 느끼게 하는 건,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어서 그럴 거야.
범식: 견딤은 결국 개별적인 것이겠지? 그래서 시간의 상징으로 한 그루의 고목을 그렸을 것 같아. 이에 반해 공간은 전체적이야. 강물, 산, 하늘이 온통 하나가 되어 있으니까.
--- p.77
캐순: 동감! 공간과 시간 즉 우주를 응축한 그림과 시가 최랑의 다락방에 걸려 있었다는 점이야. 최랑은 그런 정신과 기상 속에서 살았다는 거지. 그랬기에 최랑이 그처럼 당당하고 주체적일 수 있었다는 생각이야.
--- p.80
조선 전기에도 부자 노비가 있었어요. .. 성종 16년에 가뭄이 심하게 들어 백성들의 굶주림이 큰 문제로 떠올랐을 때, 진천에 사는 임복이라는 노비가 곡식을 2천 석이나 내놓은 일이 있을 정도로 부자 노비도 있었어요.
--- p.94
범식: 그래서 조선에선 꼬맹이 때부터 남편과 아내는 서로 존경해야 한다고 가르쳤어. 꼬맹이들이 읽었던 『사자소학』에 ‘부부는 구별이 있으니,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여라’라는 글귀가 있거든. ‘서로 손님처럼 대하는 것’보다 더 상대편을 존중하는 인간관계가 있을까?
캐순: ‘부부유별’의 핵심이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여라”였구나! 여기에 ‘서로 사랑하라’도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 p.124
“이것은 하늘로부터 받은 인격의 자연스러움에 따랐기에 가능했던 일인지, 인간의 감성으로는 차마 견딜 수 없는 일이었지요”
--- p.134
범식: “모든 것이 한바탕 꿈 같았다”는 생각 말이야. 그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을 그렇게 표현했다고 생각해. 지금껏 있는지도조차 몰랐던 문을 발견하고, 그 문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이전과는 다른 세상이라는 거지.
--- p.145
캐순: 공자님은 배움, 익힘, 기쁨 이 세 낱말에 공부의 핵심이 들어 있다고 본 거네. 아내와 남편이 한자리에 앉아 시를 지어 주고받는 것 속엔 틀림없이 배움, 익힘, 기쁨이 다 들어 있어. 그러니 이거야말로 공부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 p.154
범식: 수양대군의 구테타를 보고서 과거시험을 작파하고 떠돌이로 살며, 새로운 진실에 눈을 떴던 김시습의 눈뜸은 이생의 눈뜸이기도 하다는 거지.
--- p.158
야옹샘: ... 칸트는 신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여 ‘요청으로서의 신’이라고 했죠.
범식: ... ‘사람이 신을 필요로 하니까, 신은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 그거 재미있네요.
야옹샘: 그 점 윤리학에서 아주 중요한 거니까요,
--- p.166
야옹샘: ... 김시습은 이 세상을 제대로 살지 않은 사람은 죽음 이후에 자신을 씻는 행위가 필요하다고 여겼다는 거예요.
...
범식: 귀신과 함께 살겠다는 결심은 쉬운 게 아니야. 크나큰 선입견에서 벗어났을 때나 가능하지. 그런 점에서 이생은 저승이 아닌 이생에서 자신을 깨끗이 했다고 할 수 있겠다.
--- p.168
캐순: 첫 번째가 개인과 가족 사이에서 발생한 문제였다면, 두 번째는 나라와 나라,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발생했지. 이런 때 개인과 가족의 힘 정도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밝혀졌고.
--- p.171
밤식: ... 최랑의 환영이 왔을 때, 사회적인 체면치레 같은 건 다 팽개치고 오직 아내인 그녀와의 사귐에만 충실했으니까.
캐순: 사귐? 그 말이 정곡을 찔렀다는 생각이다. 그 자리에서부터 ‘건강한 개인’이 시작될 거라고 나는 생각해.
--- p.172
“이생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온갖 연기의 삶 속을 헤매던 자가 집착을 놓아버린 깨달음의 상태, 그것을 죽음이라는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라 보아야 온당할 것이다.”
--- p.180
캐순: 단테는 그 유명한 『신곡』에서, 자신을 지옥과 연옥을 거쳐 천국까지 경험하게 한 게 베아트리체였다고 말했지. 단테에게 베아트리체가 그랬던 것처럼, 최랑은 이생의 연인이자 스승이었어.
범식: 서양인에게 베아트리체가 있었다면, 우리에겐 최랑이 있었어!
--- p.182
“조선의 여인들은 남성들이 금 그어 놓은 선 안에서만 머물려 했던 것은 아니다. 한계적이지만, ‘가치’라는 측면에서 남성의 영역에 침투해 들어갔다. 비록 국정 운영까진 진출하지 못했지만, 남성들이 최고의 가치로 높이 받든 ‘성인과 군자’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님을 조선의 여인은 분명히 했다.
--- p.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