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나의 침대 맡에 선 페르켄은 곤히 자고 있는 루이나를 몹시 복잡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가느다란 금발 사이로 언뜻 보이는 상처가 커다란 가시처럼 제 심장에 콱 박혔다.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고개를 돌리던 페르켄의 시선이 루이나의 책상 위에 머물렀다. 제가 주었던 꽃다발 세 개가 모두 예쁘게 잘 마르고 있는 걸 보니 괜스레 제 심장이 버석거리는 기분이었다.
“왜 하필 네가 그걸 봤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듣고 있던 페르켄이 결심한 얼굴로 루이나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손을 떼고도 한참이나 루이나의 곁을 떠나지 못하던 페르켄은 문득 창밖을 바라보고는 발을 돌렸다. 달이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서둘러야 했다.
덜컹.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뜬 루이나가 벌떡 일어나 베개 옆에 두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는 거의 10년이 다 된 습관이었다. 어렴풋한 달빛 사이로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뽑아 든 루이나를 본 샤론이 놀라지도 않은 채 졸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우웅, 왜 또 그래?”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서.”
“바람이 세게 불었나 보지.”
“…그래.”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자리에 누웠지만, 금세 잠이 든 샤론과 달리 루이나는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묘하게 심장이 두근거리는 이상한 밤이었다.
--- 「Betelgeuse」 중에서
“알리오스 가에서 고아원 출신 며느리를 보려고 하겠습니까?”
공격의 화살이 대번에 현실 한복판으로 날아왔다. 페르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생각보다 계산도 빠르시고.
“제가 알리오스 가의 차기 당주입니다.”
“아직은 아니지요. 알리오스 후작께서 강건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다행이도요. 하지만 아버지는 제 일에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결정합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습니까?”
“책임질 수 있습니다.”
루이나를 소중히 여기는 두 남자의 시선이 한동안 사납게 얽혔다. 페르켄의 눈을 한참이나 쏘아보던 도미닉이 결국 고개를 돌리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왜 하필 루이나입니까?”
“그러게요. 왜 하필 루이나일까요.”
페르켄이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웃으며 반문했다. 그간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던졌던 질문이었다. 아주 잠깐 흔들렸던 시선이 곧 제자리를 찾았다.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원장님. 루이나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넘치게 사랑받을 것이고, 보호받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솔로몬이 수넴 여인을 사랑한 것 같이 아끼고 사랑하겠습니다. 원장님께서 섬기시는 신과….”
잠시 숨을 고르던 페르켄이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제가 경애하는 신의 이름 앞에 맹세하겠습니다.”
--- 「Pollux」 중에서
“희한하게…, 기분이 나쁘네.”
콕 집어 어디가 이상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위화감이 드는 분위기였다. 감쪽같이 숨어있던 대규모의 마물 떼와 마주치기 직전에 느꼈던, 딱 그와 똑같은 섬뜩함이 속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오랜 시간 생사를 넘나드는 곳에서 싸워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감이었다.
그뿐 아니라 공기조차 숨을 죽이고 있는 듯한 기괴한 느낌마저 들었다. 혼잣말도 조심스러워서 입을 다물게 될 정도였다. 차분하게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루이나가 불현듯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아니, 기분 탓이 아니야. 실제로 전혀 바람이 불지 않고 있어.
사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숨에 지형을 바꿔 버리는 어마어마한 모래바람도 어느 순간부터인지 모르게 잠잠했다. 가만. 뭔가 살아있는 걸 본 게…, 어제 오아시스에서 봤던 도마뱀이 마지막인가?
눈동자를 바삐 움직이며 최대한 신속하게 기억을 더듬던 루이나가 절로 튀어나오려는 신음을 꿀꺽 삼키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순간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로 더웠는데도 그랬다.
--- 「Canopus」 중에서
“별똥별이네.”
긴 꼬리를 매단 채 떨어지는 별을 보며, 루이나는 처음으로 소원이라는 걸 생각해보았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초자연적인 현상에 기대본 적이 없는 루이나였지만, 지금만큼은 지푸라기 한 가닥이라도 절실했다.
“페르켄….”
가장 그립고,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이가 떠오르자 루이나는 조금 풀이 죽었다. 페르켄을…, 만나고 싶어. 끝맺지 못한 말을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루이나. 언제 들어도 울림이 좋은 근사한 목소리였지만, 루이나의 얼굴은 살짝 일그러졌다.
이런, 환청까지 들리는 건 안 좋은 징조인데. 열을 내리려면 찬물에 몸을 담그는 게 좋을까? 그랬다가 더 악화되면 어쩌지?
“루이나!”
이번에는 좀 더 크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가쁜 숨이 섞인 애절한 부름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던 루이나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어둠 속에서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사색이 된 페르켄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 「Canopus」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