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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블록

소년의 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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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3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552쪽 | 644g | 135*205*27mm
ISBN13 9791159314704
ISBN10 1159314705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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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인정한다. 진단을 받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마침내, 부를 명칭이 생겼다! 학교 가는 길에 아이가 괴성을 지르며 싸움을 벌일 때, 식당에서 테이블 밑으로 숨을 때, 조디가 아니면 그 누구든, 친척이든 친구든 포옹은 물론 아는 척도 안 하려 들 때, 그건 자폐라서 그렇다. 자폐가 그렇게 만든다. 나는 자폐를 사악한 혼령, 폴터가이스트, 악마로 보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정말 [엑소시스트]라는 영화 속 삶을 사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문득 아이가 목을 360도 돌리면서 방 한가득 끈끈한 초록색 액체를 토해낸대도 놀랄 것 같지가 않았다. 적어도 내가 할 말은 생겼다. “괜찮아, 자폐라서 그래. 초록색 끈끈이는 뜨거운 물로 씻어내면 되고.”
--- p.23

원래는 숙제를 끝낸 다음, 공원에 다녀온 뒤에, 게임을 같이 하자고 할 참이었다. 나는 조디가 남긴 목록을 훑어봤다. 콕 집어서 ‘내가 집을 나선 뒤 2분 만에 마인크래프트를 켜면 안 됨’이라는 지시는 없었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가서 공원에 먼저 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지옥이 되어버릴 터였다. 집에 있으면 적어도 무서운 개한테 습격받는 일은 없겠지. 내가 주말을 잘 보내려면 아마도 이 방법이 최선일 듯싶었다. 그때, 아이의 발소리가 계단 위에서 다시 들려왔다. 아이가 계단 꼭대기에 서있었다.
“이리 와, 아빠!” 아이가 소리 질렀다. 신이 난 아이를 보니 망설이던 내 마음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게임만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나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나 보다.
--- p.167

우리 둘 다 집을 향해 달렸다. 나무를 피해 이리저리 길을 꺾으며 달리는 동안 빛이 점점 저물어갔다. 늘어져 매달린 나뭇잎 속에 움직이는 물체가 있는지 둘러보았다. 곧 어둠이 우리 주위로 내려와 앞을 보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샘이 앞에서 길을 재촉했다. 금방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서 아이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이 기억 나지가 않아!” 내가 말했다.
달그락 달그락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전에 들어본 적 없는 이 이상한 소리가 수풀 뒤에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마 농장에 있던 또 다른 동물, 닭이랄지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던 차에 그만 그놈에게 등을 맞았다. 나는 곧 내가 심하게 다쳤다는 걸 알았다.
“아아, 안 돼, 스켈레톤들이 왔어! 활과 화살을 갖고 다니는 놈들이야!”
--- p.190

에마와 나는 전에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10대 시절에는 스스로에게 매몰되어 조지의 죽음이라는 그늘 속에서 각자의 정체성을 구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떠나버렸다. 서너 번 그녀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먼 친척처럼 굴었다. 너무도 예의 바른 대화에 이미 여러 번 해서 시들한 농담을 나누며 각자 삶의 겉면만 훑었다. 우리가 혹시 리얼리티 티브이 쇼 같은 데에 함께 출연한다면 나는 아마 카메라에 대고 “우리는 아직 그 이슈를 가지고 정면으로 맞서본 적이 없어요.”랄지 아니면 “과거를 직시한 적이 없어요.”라고 고백할 것이다. 그런 쇼에 나갈 일은 전혀 없겠지만. 왜냐하면 첫째, 지금으로선 좀 늦은 감이 있기도 하고 둘째, 우리는 영국 사람이니까. 게다가 우리 어머니가 가르쳐준 바에 의하면 우리 마음을 더 기울여야 할 것은 미래이지 과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에마를 데리고 런던에 있는 그 카페에 가고 싶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그 완벽한 날을 다시 한번 그녀와 경험하고 싶었다.
--- p.243

“타비타 생일 파티에 아이를 데려가 보는 건 어떨까?” 내가 말했다. “애가 사람들과 소란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자고. 그런 거 해본 지 꽤 오래됐잖아.”
그러고는 우리 둘 다 속으로 신음을 했다. 마지막으로 생일 파티에 초대받아 갔을 때 일어났던 ‘아이스크림 다 토하기 대재앙’이 기억나서였다. 하지만 때는 10월 중간 방학이었고, 또 샘에게 하루에 딱 두 시간으로 엑스 박스 시간을 제한했어도 아이가 즐거이 지내기를 여러 날째라 조디가 이런 종류의 실험에 좀 더 너그러우리라 짐작했다. 내 진의는, 우리 둘 다 거기 가서 아이를 지켜보고 있다면 뭐가 얼마나 나빠질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
“그래,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네. 행운을 빌어.” 조디가 말했다.
그 말과 함께, 부모의 책임이라는 공이 내 쪽으로 떼구르르 굴러왔다.
--- p.282

“가서 소 좀 봐도 돼?”
“학교에서 어떤 점이 네 마음에 안 드는지 얘기해주면 가서 봐도 돼.”
“잘 몰라. 어떤 때는 화가 나. 내가 나쁜 놈이라. 크리퍼처럼. 어떤 때는 내가 망쳐서 울게 돼.”
“뭐라고? 네가 뭘 망치는데?”
“전부 다.”
그러더니 아이가 자리를 박차고 울타리를 향해서 뛰어갔다. 아이가 신은 장화가 부드러운 흙 속으로 푹푹 빠졌다. 나는 그릇을 내려놓고 아이를 따라가며 애가 한 말을 생각해봤다. 전부 다라니. 그래, 전부 다 어렵고 전부 다 힘들 것이다. 아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을 견디면 그다음도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다가와 난타당하듯 세월 대부분을 보냈을 테니까. 아이가 마인크래프트를 그토록 좋아하는 것도 놀랄 일이 못 됐다. 게임에서는 모든 것이 깔끔하고 논리적이지 않은가.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만들 수 있지 않은가. 아이의 삶에서 그렇게 유연하게 다룰 수 있는 건 달리 아무것도 없었다.
--- p.307

집으로 반쯤 갔을 때 몇 주 전에 정신과 의사와 예약을 했던 일이 생각났다. 내일이었다. 바로 그때, 샘이 나를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내 생각을 읽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진지하게, 묻고 싶어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빠, 지금 뭐 하는 중이야? 아빠는 갇혀있는 것 같아. ”
“그게 무슨 말이야?”
“가끔 나는 어떤 생각에 갇혀서 못 나올 때가 있어. 오래는 아니고. 그 생각이 계속 계속 남아서. 아빠도 생각에 갇혀있는 거야?”
--- p.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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