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지촌이 고향이다. 오래전 그 도시 아가씨들은 시집가기도 어려웠다. 기지촌 사는 젊은 여자라고 하면 양공주라는 오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출신지를 숨기고 선을 보러 다니곤 했다. 어릴 적에는 양공주가 뭐하는 직업인지도 몰랐다. 공주라는 말이 들어가서 되게 좋은 직업인 줄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동네 아이들의 이모나 고모, 누나나 언니 중에 누군가 하나씩은 양공주였는데 그런 집에 가면 밤톨만 한 미제 땅콩이니 초콜릿이니 구경도 못해본 먹을거리가 흔전만전 이었다. 나는 철딱서니 없게 우리 집에도 양공주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양공주가 뭐하는 직업인지 어른들한테 물어보기도 했을 터. 어른들은 설명할 길이 막막하니 대강 얼버무리며 넘어갔을 것이고 어린 나는 끝내 그 직업의 실체를 알 수 없었던 것이리라.
국민학교에 들어가니 각 반마다 덩치 큰 혼혈아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대개 육상부 같은 운동부를 했다. 발육이 남달라서 체육선생의 스카우트 대상 1순위였기 때문이다. 혼혈 여자애들은 신비롭게 아름다웠다. 한미연합 군사 작전이라도 할 때면 전교생이 길가에 나가 지나가는 군인들에게 국기를 흔들었고, 미군 사령관이 퇴임할 때면 여학생들이 동원되어 매스게임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가 어이없는 강제동원들이다. 청소년 무렵엔 이미 동네 환경이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는 자각이 생겨 왠지 모를 주눅이 들고 여기 아닌 다른 곳의 생을 꿈꾸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고향을 떠나왔고 지금은 서울특별시민인 척 살고 있지만 나는 안다. 내 유년의 영혼에 깊이 박혀버린 그 기묘하게 애달프고 서러운 정서를.
드라마를 처음 배우기 시작하던 때, 선생은 내가 써가는 아이템을 번번이 퇴짜놓았다. 대체 어떤 아이템을 잡아야 하는가 실의에 빠져 있는데 선생은 차라리 내 단편소설을 각색해보라고 하셨다. 기지촌의 엄마 없는 꼬마에 관한. 그렇게 내가 태어난 기지촌을 배경으로 내 인생의 화두였던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10년도 훨씬 더 전에 내가 처음으로 써본 대본이었다. 2년 뒤 방송사 공모에 당선이 되어 처녀작으로 공모를 통과한 으쓱함을 느낀 것도 잠시, 그 뒤 이 작품은 10년을 표류하게 된다. 이 작품을 연출하고자 했던 감독이 캐스팅을 하고 촬영일정을 잡았는데 방송사에서 단막극 자체가 폐지되었다. 작품에도 운명이란 것이 있다. 이 작품의 운명은 그런 것인가 좌절하던 세월이 몇 년. 또다시 방송사에서 2부작 특집극으로 만들어보겠다며 감독을 선정해주었다. 밤낮없이 한 달을 꼬박 매달려 2부작으로 각색을 했다. 허벅지에 땀띠가 나고, 방석이 해져서 커버가 찢어질 정도로 작업에 몰두했다. 침대에 눕지도 못하고 의자에서 쪽잠 자가며 대본을 고쳤지만, 앞서 나간 다른 특집극 시청률이 안 좋다며 차기 특집극 편성은 좌절되었다. 작품이 또다시 엎어지던 날, 볕 좋은 삼청동 전광수 커피숍에서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잠시 울었다. 아까웠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그다음 해, 한국 콘텐츠 진흥원에서 지원하는 단막극 제작지원사업에 응모했고, 다행히 지원작으로 선정되었다. 그때 지원된 1억 원이 씨앗이 되어 저예산 영화가 만들어지고, 이렇게 대본까지 책으로 묶이게 되었다. 이 작은 작품이 빛을 보게 되기까지 무려 10여 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불황의 출판가에서 소설도 아닌 대본집을 내겠다고 결단을 내려주신 가쎄 김남지 대표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더운 여름날, 같이 고생하며 울고 웃어준 수연과 이 책을 나눌 수 있어 기쁘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주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응답이 온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배웠다. 어려운 가운데 제작의 의지를 세워준 제작자 고영조 대표님과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해준 주연배우 신이, 해가 바뀌어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후원해주신 서울방송 김영섭 국장님과 콘텐츠 진흥원 관계자 여러분에게, 끝으로 책이 나오기까지 애써준 후배 현영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작가의 말 - 조현경」
그해 여름, 우리가 작업을 하던 강남의 한 레지던스,
무더위와 잦은 미팅을 핑계로 들어앉아 작업에 몰두했던 그 공간은 몰입을 위해 외부와 담을 쌓았던 우리들의 진지(陣地)였습니다.
감독과의 밤샘 미팅과 술자리 후에도 새벽에 일어나 어지러운 머리, 메스꺼운 속과 싸우며 작업하는 시늉을 하면서 작가가 뭐하는 사람인지, 창작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겁 없이 작업에 뛰어들었던 그때 ‘작가가 이런 직업이구나’ 몸으로 체험하게 해 준 작품 『홀리』가 책으로 출판된다는 소식에 벅찬 기쁨을 느낍니다.
홀리와 완이에게 빠져 지냈던 그해 여름은 지나갔지만 지금도 자기 전에 홀리와 완이의 행복을 빕니다. 그들이 그 후로도 쭉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우리가 누군가의 자식이며 누군가의 부모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는 완이의 꿈에, 외로운 엄마 홀리를 생각하는 완이의 갸륵함에 더 매혹되었고 수진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타인에게 빚이 있는 우리의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딸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은 홀리의 희생에 더 마음이 갑니다.
26시간의 산고 끝에 태어난 딸아이가 주는 행복은 그 당시로 돌아가 그 고통이 26일의 것일지라도 당연히, 감사히 참아낼 수 있을 만큼 소중합니다. 딸에게 클럽으로 심부름을 시키고 밥상을 차리게 하는, 상식에 벗어난 엄마지만 그녀의 희생이 가슴 아픈 건 그녀도 딸을 사랑하는 평범한 엄마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홀리의 희생이 딸 완이를 통해 발레리나 홀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철없는 딸에서 언젠가 엄마가 되는 우리 인생과 닮아 애착이 갑니다. 이 작품을 통해 평생 6남매를 위해 희생하신 엄마를 딸의 존재와 함께 떠올리게 되었고 이제는 전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을 가슴 아프게 느낍니다. 사회의 낮은 곳에서 사랑하고 희생하며 꿈을 키운 그녀들이 마치 살아있는 이웃처럼 지금도 계속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글을 쓰며 나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이야기에 나 자신이 녹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두렵기도 하고 훌륭한 인간으로 거듭나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습니다. 나라는 사람은 불행한 일도 겪고 마음의 고통도 받으며 성장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얼마나 부족하고 평범한 인간인지를 깨달은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계속 이 길을 가며 제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저에게 작가라는 희망을 심어준, 나보다 더 작가 같은 남편과 그 희망에 길을 터주시고 등단작품의 시나리오 작업에 동참하게 해주신 조현경 선생님, 부모님의 빈자리를 채워준 사건 사고의 대명사 나의 형제자매들에게 사랑을 전합니다. 그리고 딸아이의 존재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끊임없이 묻고 반성하게 해 주신 이 세상 모든 신에게 감사합니다.
---「작가의 말 - 김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