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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3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506쪽 | 128*188*35mm
ISBN13 9791128834318
ISBN10 1128834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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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난한 이민자로 상륙했더라면 어디서 살아야만 했을까? 외삼촌의 해박한 이민법에 비추어 볼 때 그는 미국 입국 허가조차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도 모른 채 본국으로 송환됐을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동정심을 기대할 수 없다. 이 점과 관련해 카를이 미국에 대해 읽었던 것이 모두 정확했다. 여기서는 행복한 사람들만이 주위의 걱정 없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자신들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p.56

카를은 그 하녀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품고 있지 않았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과거의 복잡한 기억 속에서 그녀는 항상 부엌 찬장 옆에 앉아 그 찬장의 판자 위에 팔꿈치를 대고 있었다. 카를이 가끔 아버지를 위해서 물컵을 가지러 가거나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부엌에 들어갈 때면 그녀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때로는 그녀가 부엌 찬장 옆에서 이상한 자세로 편지를 쓰다가 카를의 얼굴을 보고 영감을 얻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그녀가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는데, 그럴 때는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가끔 그녀는 부엌 옆에 있는 좁은 방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그때 카를은 지나가면서 조금 열려 있는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떤 때 그녀는 부엌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카를이 길을 막으면 마녀처럼 웃으면서 달아나기도 했다. 또 카를이 부엌에 들어와 있던 어떤 때는 부엌문을 걸어 잠그고 열어주지 않아 카를이 나가게 해 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문의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카를이 전혀 갖고 싶지도 않은 물건을 갖고 와서 슬며시 카를의 손에 쥐여 주기도 했다. 그런데 한번은 그녀가 “카를!” 하고 부르고서, 뜻밖에 말을 걸어온 데 놀란 카를을, 인상을 찌푸리고 거친 숨을 내쉬면서 자기 방으로 끌고 가서 문을 잠갔다. 그녀는 목을 조르기라도 하듯 그의 목을 감쌌다. 그녀는 옷을 벗겨 달라고 졸랐지만, 사실은 그녀가 그의 옷을 벗겨서 그를 침대에 눕혔다.
--- pp.43-44

언젠가 카를이 테레제와 나란히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을 때, 테레제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얘기했다. 테레제가 다섯 살 무렵 어느 겨울 밤, 어머니와 테레제는 각자 보따리를 든 채 잠자리를 찾기 위해 거리를 급히 걸어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그녀의 손을 끌어 주었으나 눈보라가 몰아쳐서 앞으로 걸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게 되자 손의 감각을 잃고는 테레제를 돌아보지도 않고 떼어 놓았다. 테레제는 있는 힘을 다해 어머니의 치마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테레제는 자주 비틀거려 넘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미친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어머니의 유일한 소망은 어디든 따뜻하게 쉴 수 있는 장소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그런 장소를 구하지 못했다. (...) 한두 차례 어머니는 숨을 헐떡이면서 조용한 계단의 층계 위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싫다고 하는 테레제를 끌어당겨 아플 정도로 억지로 키스를 했다. 테레제가 나중에 그것이 마지막 키스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아무리 작은 어린애였다고 하지만 그것을 모를 만큼 아둔했다는 사실을 그녀 자신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때로는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때로는 어머니의 치마에 매달린 채 한마디 위로의 말도 듣지 못하고 끌려가는 것은, 어린 그녀로서는 물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이 모든 것에 당황한 테레제에게는 어머니가 자기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안전을 위해 테레제는 어머니가 한쪽 손을 잡고 있을 때도 다른 손으로 어머니의 치마를 더욱 단단히 붙잡고 이따금 흐느껴 울었다. (...) 마침내 모녀가 도착한 곳은 어머니가 그날 아침에 오기로 약속했던 바로 그 공사장이었다. (...) 어머니는 그대로 걸어가 조그마한 벽돌 더미로 다가갔다. 그 벽돌 더미를 넘어서 난간은 끊기고, 아마 길도 끊길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난간을 붙잡지 않고 벽돌 더미 쪽으로 돌진했다. 거기서 어머니의 능숙한 솜씨가 어머니를 버린 것 같았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벽돌 더미를 넘어뜨리면서 그것을 넘어서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 pp.21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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