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의 인물들은 그 나름대로 변동기, 전환기, 격동기를 살았던 인물들로서, 이들의 행적은 일관성과 자기 모순을 동시에 보여준다. 또 격랑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평가도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역사의 ‘관중’인 우리로서는 모두가 그들을 안다고 생각하고, 그들에 대해 저마다의 평가를 내리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러한 우리의 평가는 어떤 점에서는 옳고, 또 어떤 점에서는 그르지만 우리는 청중인 관계로 ‘절대적으로 공정한’ 평가를 내릴 의무가 없다.---‘들어가는 말’
∵ 이승만은 국제 정치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한국의 위상이 전적으로 미국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외교에, 특히 미국을 상대로 ‘올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대일 의혹과 경계도 미국을 지렛대 삼아 방어하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재미학자 방선주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방선주는 이승만을 객관적 정세와 조건을 고려해 일본에 대한 강온 양면 전술을 구사하는 현실주의적 정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적 인물로 평가한다.---이승만_현실주의적 정치가, 미국에 올인하다’
∵ 김윤식이 활동한 시기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약체인 조선이 살아남기도 힘겨운 때였다. 아편전쟁의 피해가 컸다고는 하나 청나라는 여전히 동북아시아를 호령하는 대국으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보다 20여 년이나 앞서 문호를 개방한 후 서양 문물을 도입하면서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결코 조선은 나라의 자존과 체면만을 생각할 만큼 한가로운 여건이 아니었다. 김윤식이 보인 소국 의식과 사대 의식은 열등감의 표출이나 국가 존립에 대한 부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강대국에 의지해 소국으로서의 생존 전략을 모색하기 위한 방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소국이 대국을 섬기고, 대국이 소국을 우호적인 이웃 국가로 상대하는 이른바 사대교린은 동북아시아의 전통적인 외교 방식이었을 뿐이다.---김윤식_시대를 읽고 시대에 답한 인물’
∵ 최명길의 성실성과 희생적 활약에 힘입어 조선 국가와 민중은 최악의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그것이 역사 속에서 최명길이 누린 행복이고, 국가와 민중이 그 혜택을 입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행복은 그가 사족의 공론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 주관과 실천력 위에서 행동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동시대의 주류를 장악한 인물들과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그는 자기 논리를 전파하고 후계 세력을 키워 정권을 장악하고 후대의 정치를 주도하는 흐름을 빚어내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최명길_시대의 소인, 역사의 거인’
∵ 13세기 전반 고려와 원 사이에 계속되었던 교전은 1260년대 이후 중단되고, 이후 양국 간에는 화친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몽골의 정치, 경제, 외교적인 간섭은 이후 오히려 더욱 심해졌으며, 일본 정벌 등을 통해 몽골군이 계속 한반도를 오가고 있어 군사적 긴장 관계도 여전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는 국체와 국가 제도를 보전하기 위해 원의 간섭을 받아들이게 된다. 원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원종은 바로 그러한 상황에 부닥친 왕이었는데, 우리는 그의 개인적 재능이나 그 의지의 신실성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런 만큼 유난히 어려운 처지에 놓였던 그 왕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원종이 처해 있던 상황을 계승해 양국 사이에 새로운 질서를 모색한 충렬왕이나, 충렬왕 대 시도하지 못했던 문제들, 예를 들어 정방의 혁파를 통해 정치 개혁을 단행하고, 부세 체제를 혁신해 호구와 토지 현실을 함께 반영한 세정을 정립하는 경제 개혁을 단행해 나간 충선왕과 달랐던 것은 확실하다. 원종은 그렇게 두드러진 업적은 보여주지 못했다.---원종_과연 주권을 포기한 왕이었을까?’
∵ 김춘추는 당을 신라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삼국 간 항쟁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핵심적 요소임을 직시하고, 대당 외교에 직접 뛰어들었다. 비담의 난을 진압한 이듬해인 648년, 김춘추는 아들과 함께 직접 당에 사신으로 갔다. 김춘추가 직접 조공사로 오자, 당 태종은 신라의 정치적 실력자를 극진하게 대했다. 선덕여왕 말년 여왕 통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신라를 비아냥거리던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였다. 이에 김춘추는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핍박하는 상황을 설명한 뒤 이들에 대한 군사적 응징을 요청했고, 당 태종 역시 흔쾌히 군사적 출동을 허락했다. 물론 당나라가 고구려, 백제를 공격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신라를 도와주기 위한 목적만은 아니었다. 주변국을 통제하고 제국으로 자리매김하려는 과정에서 당은 고구려와 같은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이거나 때로 적대적 행동을 취하는 국가를 제압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의 배후에 있는 신라가 군사적 동맹을 요청한 것은 당으로서도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더욱이 신라 정계를 주도하는 김춘추가 직접 찾아와 요청했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과 신뢰도 측면에서 당의 관심을 끌 만했다. 그리하여 신라와 당 사이에 정치적?군사적 동맹 관계가 형성되었다. 나당동맹을 이끌어 낸 김춘추의 활동은 한반도 삼국 간의 통일 전쟁 양상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그 결과 후진국이었던 신라는 당의 적극적 지원을 바탕으로 강대국 고구려와 백제를 제압하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김춘추_난세를 이겨 낸 현실주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