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의 괴테와 시인 릴케를 잘 아는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도 현대 독일의 드라마와 세계 연극의 거장 브레히트의 이름은 아직 낯설 수 있다. 그의 작품과 연극세계가 우리나라에서 해금되어 자유롭게 연구되고 공연된 지 겨우 30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발전시킨 ‘서사극’이라는 이름과 양식, 서사극을 서사극답게 만드는 ‘낯설게 하기’의 테크닉, 이른바 이화·소격 효과(Verfremdungseffekt)는 연극의 일반화된 용어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낯설게 해서 두드러지게 만드는 무대 위의 기법과 효과가 동양 연극에서는 보편적인 테크닉이기 때문일 것이다.
1920년대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들)’ 세대로 기존 문화예술에 도전하고 도발을 서슴지 않던 브레히트는 1930, 40년대 나치스 정권에 쫓기는 유랑의 신세였고 그의 서사극적 작품들은 거의 상연조차 되지 못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망명지에서 구동독의 동베를린으로 돌아와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인 브레히트는 전쟁의 폐허에서 겨우 부조리극 등으로 버티던 아리스토텔레스 미학에서 벗어나는 비(非)아리스토텔레스 미학의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동구권에 속하던 공산주의 작가로 낙인찍힌 브레히트는 우리나라에서는 터부시되었다. 다행히 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 그의 사후 30년 만에 작품 반입과 연극 상연, 그리고 공개적인 연구 발표 등이 해금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감정이입과 카타르시스의 종래 연극에 대해서 깨어 있는 의식, 비판적 자세를 강조하는 서사극은 연극에 몰입해 들어가는 관객의 감정과 의식을 중단시키고 그 흐름을 가로막는다. 그런 까닭에 드라마 작품의 호흡만 끊어지면 그것이 ‘서사극적’이라고 착각하는 아마추어 연출가들에 의해서 서사극이 재미없는 연극 같은 곤욕도 많이 치렀다. 그래서 더 즐겁고 재미있는 연극이 되기 위해 낯설게 하기 위한 무대 위의 두드러지기 수법이 필수적이다.
---「책머리에」중에서
한낱 기계에 지나지 않는 시계가 이화(異化, verfremdet)되어 낯설어지고 두드러져 보이고 비중이 높아진다. 연필 한 자루를 흔들어도 그것이 지휘봉이 될 수 있고 상대를 찌르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무엇을 낯설게 만들어서 무대 위에 두드러진 장면을 만들어내어 관객들의 시선을 모으고 의식을 일깨우느냐가 서사극의 낯설게 하기 수법, 곧 이화 효과가 몰아 올리는 궁극적 목적이다.
이 서사극의 핵심 테크닉은 연기자들의 저마다 다른 등장으로 낯선 장면이 만들어지지만 제3자인 해설자의 등장으로, 노래로, 가면 등으로 표현을 바꿀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대사를 바꾸는 형식으로, 문장으로 말하면 산문조에서 운문 형식으로, 시를 읊조림으로써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 혹은 그 반대로 운문에서 산문조로, 노래가 대사로, 대화 형식에서 노래로 바뀜으로써 낯선 두드러진 장면을 만들어낼 수가 있다.
환등기를 통한 이미지 형성 같은 영화 기법의 활용도 가능하고 플래카드나 자막 이용으로 연극 진행의 호흡을 바꿀 수도 있다. 극중극의 수용, 전형(典型)의 뒤집힘, 잘 알려진 사실의 인용(引用), 일인다역(一人多役) 등의 다양한 모든 수법들이 전형적인 서사극의 낯설게 하기 테크닉으로 무대를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그렇게 말하면 우리나라 민속극에 친숙한 독자라면 민속극 열두 마당이 줄거리의 전체적 승계 없이, 어떻게 보면 기승전결의 법칙 없는 잡다한 집합체를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놀이 연희전승 형식에 익숙한 눈으로 보면 서사극이라는 것이 우리 체질에 익숙한 이야기 전승 체계라는 데 긍정하기 쉽다. 단지 의식적이냐, 의도적이냐, 그만큼 계산적이냐 하는 차이는 분명히 있다. 대체로 유럽미학이 그리스 이래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서정시(운문), 서사시(이야기 형식-산문), 드라마(연극 양식)의 삼분법으로 전승된 탓으로 우리나라를 위시한 동양권의 미학이 수립되지 못하고 동남아, 아프리카, 남미 등 몸의 미학을 전승시켜 나온 전통 예능 위주의 세계에서는 서사극적 수법이라는 낯설게 하기의 두드러짐 연출 수법은 오히려 천연의, 당연한, 자연스러운 기법일 수 있다. 그런 생리가 우리의 체내에 면면히 흐르고 있어서 ‘서사극의 낯설게 하기’ 수법은 음양오행설처럼 큰 거부감 없이 수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51~52
그의 새로운 민중극, 곧 통속극의 리얼리즘은 진부하고 일상적인 트리비얼리즘이 아니고 작품 줄거리의 명확성을 기하기 위하여 세밀한 디테일 묘사를 서슴지 않는 대신, 딸이 아버지로부터 술병을 거두어낼 때 아버지 푼틸라에게 리어 왕 같은 고전적 양식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예술 양식 문제 이전에 브레히트가 민중극이 지녔던, 그러나 이제 거의 잊어버리고 있는 민중적 세계의 축제적 코스몰로지에 유념했는가는 의문이다. 그가 의도적으로 민중극의 코스몰로지를 외면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가 ‘민중극’이라는 부제를 붙여 강조한 작품의 주인공에게서 민중극적·축제적 코스몰로지를 읽어내고 그런 광대적 요소에 조명을 비추어 작품 해석과 수용의 지평을 넓히는 작업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푼틸라’라는, 어쩌면 가장 비합리적인 세계로서 우주 해석의 원리를 가장 합리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의 유물론적 세계관으로 정화시킨 브레히트의 정신 속에도 잠재적으로 비합리적인 신화 세계의 편린이 푼틸라라는 인물을 통해 용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p.7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