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급수납원은 원래 비정규직이었을 것이라고, 힘든 일자리는 원래부터 비정규직 일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 힘든 일자리가 비정규직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요금수납원들도 원래 정규직이었다. 도로공사는 IMF 사태 이후 외주화를 시작하더니 2008년 전면 외주화를 단행했다. 그 이후 노동자들은 끔찍한 고용불안과 지독한 차별을 겪었다.
도로공사는 요금수납원들에게 자회사로 가면 임금을 30% 올려 주고 정년을 1년 연장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노동자들은 이것 때문에 흔들리진 않았다. 그런데 자회사를 거부하면 수납 업무를 주지 않겠다는 협박은 달랐다. 전혀 다른 일을 해야 한다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애인들의 고민은 더 컸다. 다른 업무를 하는 게 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도로공사는 요금수납원이 직접고용 되면 기존에 일하던 영업소에서 멀리 떨어진 영업소로 배치하겠다고 했다.
“여름에 부스 안에서 구슬땀 흘리며 힘들게 근무할 때 고장 난 에어컨을 고쳐 주지 않더니, 실적과 관련된 입구 정보조회 시스템이 고장 나자 바로 수리했어요. 언제나 근무자보다 중요한 건 실적이에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한국도로공사는 우리에게 더 큰 용역업체(자회사)로 가라 합니다. 그게 싫다 했더니 해고합니다. 우리는 근로자지위확인소송 1, 2심에서 정규직 판결을 받고, 대법원 결정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법도 우리가 정규직이라는데, 다시 용역업체 직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직접고용을 당당히 외치면서 13년 수납원 생활동안 잃어버렸던 자존감을 찾았습니다. 비굴했던 지난날의 저는 죽었습니다. 직접고용 될 때까지 싸우겠습니다. 나의 선택은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바로 보나, 거꾸로 보나 옳기 때문입니다.”
캐노피에서의 생활은 힘들었다. 여름 한낮에는 기온이 46도까지 올랐다. 뜨거운 햇볕을 피할 곳이 마땅히 없었다. 탈수 증세를 보이고 화상을 입는 노동자들이 생겨났다. 이름 모를 벌레와도 싸워야 했다. 소음과 매연도 너무 심했다.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큰 차가 지나갈 때는 심한 진동 때문에 구조물이 흔들렸다. 캐노피 위에서 매일 선전전과 집회를 3번 이상 했는데 지붕이 흔들려 멀미가 났다. 캐노피 주변이 높은 빌딩으로 둘러싸여 있어 편하게 볼일을 볼 수 없었다. 억지로 참기도 했다.
“서울영업소 캐노피에서 바라본 양쪽의 불빛은 달랐습니다. 건너편 분당의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는 밤에도 환했습니다. 평온했습니다. 서울영업소 주위를 빼곡히 둘러 찬 숱한 텐트들은 어두웠습니다. 불안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 자체가 늘 불안했습니다. 1년이 아니라 1개월, 3개월 만에 재계약할지 말지 결정하는 영업소도 있었습니다. 1,500 직접고용은 가능할까, 동료들이 떠나가지는 않을까. 나 없는 사이에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텐트 안에 있는 음식은 상하지 않을까. 빛의 차이는 삶의 차이인가. 우리가 저 화려한 아파트, 그리고 그 아파트가 상징하는 엄청난 부를 바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잘릴 걱정 없이 직장을 다니게 해 달라는, 정말 최소한의 요구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도 힘듭니다.”
“이제는 나로 한번 살아 봐야 하지 않겠어요.” 톨게이트 투쟁의 시작과 끝은 사실 이것인지 모른다. 처음부터 나로 한번 살아 봐야겠다고 생각했든, 나중에 투쟁하면서 생각했든, 자신으로, 나의 힘으로, 나의 옮음으로 살아 보겠다는 생각이 이 투쟁을 만들었다. 그런데 나로 한번 살고 싶은 마음을 흔드는 게 너무 많았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 천백만 비정규직의 고통과 분노는 켜켜이 쌓여 있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시한폭탄이 아닐까? 영리한 지배자라면 함부로 크게 건드렸다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 계산할 것이다. 그렇다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 자신 있게 싸울 수 있다. 저들이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분노와 힘이 있다는 걸 믿고.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능력 기준인가?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와 간호조무사의 능력은 의사의 능력에 못 미치는가? 응급환자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앰뷸런스 운전자의 능력은 얼마나 대단한가? 인명구조를 위해 불구덩이에 온몸을 던지고, 높은 빌딩 벽을 타며,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리는 119구조대원의 능력이 왜 교수의 능력보다 떨어지는가? 컨베이어라인을 타며 자동차를 조립하는 숙련된 노동자의 능력이 왜 이사의 능력보다 낮게 취급되는가?
‘없어질 일자리’라는 주제는 새로운 주제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노동자가 자동화나 신기술을 핑계 댄 해고 때문에 일터에서 쫓겨나고 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그랬고 노동자들은 본능적으로 질문한다. “그것들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노동강도를 낮추고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수단으로 이용해야 한다.” 사장들은 반박한다. “나는 이윤을 위해 그것들을 도입했지 당신들을 위해 도입한 것이 아니다. 당신들을 위한 것이라면 내가 뭐 하러 그 피같은 돈을 투자했겠는가? 그런 정신 나간 사장은 없다!” 중간의 길이 없기에 해고는 힘의 문제로 결정되어 왔다. 그게 아니라면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정부도 도로공사도 다른 방법 대신 해고를 선택했다. 하이패스 도입 후 해마다 수백 명이 잘렸다.
신기술을 만들어 낸 가장 결정적인 주체는 바로 노동자들이다. 물론 과학자들이나 전문 연구원들이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도 분명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그래도 가장 커다란 공헌을 한 당사자는 단연코 노동자들이다. 매일 반복되는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노동 속에서 효율적인 작업 방식과 낭비적인 방식에 대한 데이터가 축적된다. 기존 작업 방식에 대한 노동자들의 사소한 불만, 더 나은 작업 형태와 개선방안에 대한 평범한 노동자들의 아이디어가 이미 여러 기업에서 제안제도를 통해 수집되고 있다. 그런 것들을 토대로 하지 않은 채 현실적으로 쓸모 있는 신기술 개발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자동화를 핑계로 수년, 수십 년 일한 노동자를 하루아침에 해고하는 게 정의롭고 인간적인 일인가? 자동화는 노동자에게 봉사하는 일이 될 수 없는가?
노동자들은 늘 서로를 격려하려고 했다. 노동자들이 동료들에게, 연대하러 온 노동자들에게 했던 수많은 말은 바로 이 말로 압축될 수 있다. “혼자라면 결코 상상도 못했을 싸움을 당신이 있기에 합니다.”
“톨게이트 노동자 여러분, 당신들은 옳았습니다. 우리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드는 투쟁의 과정에서 다시 만날 것입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