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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선시

바람의 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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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4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60쪽 | 368g | 152*210*12mm
ISBN13 9791189052188
ISBN10 1189052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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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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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하루의 오전이 지나고 나면 양지쪽 보리밭 언덕은 자작자작 눈이 녹아 어린 보리 잎들은 초록 오선지처럼 길게 이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긴 담뱃대에 몇 번 불을 붙이고 나서 나를 데리고 밭으로 나섰다. 땅이 얼어 부풀어 오르자 보리 뿌리도 덩달아 허공에 떠올랐다. 덜 녹은 눈이 듬성듬성 길게 늘어선 보리밭 이랑을 꾹꾹 밟기 시작하시면서 뒤따라와라 하시었다. 시린 발바닥으로 조곤조곤 밟으며 따라가다 보면 바스락바스락 보리 잎이 아픈 소리를 내기도 했다.
달력의 봄인 입춘이 지나고 한 달이 넘게 흘러가야 틈새마다 봄이 비집고 나왔다. 대문이나 기둥에 붙어 있는 입춘대길 글자가 퇴색할 무렵 온 들녘은 초록을 일으켰다. 낡은 자전거 탄 우체부가 한 뼘도 넘게 자란 보리밭 언덕을 힘겹게 넘어가기도 했다. 보리밭은 바람결에 실려 오는 풋풋한 풀냄새보다 더 코끝 찡한 어린 시절 추억이 담겨 있다. 이때쯤엔 전라도 김제평야의 넓은 들엔 청보리밭 축제가 절정에 이른다.
연초록 주단을 펼쳐놓고 연주회가 열리면 관광객은 구름처럼 모여든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평선에 바람개비가 돌고 유채꽃은 질투하느라 얼굴이 노랗게 들뜬다. 나비조차 바람에 실려 와 보리밭 물결에 파도타기를 한다. 수양 버드나무는 긴 가지를 늘어뜨려 그네를 뛰고, 늦서리 견딘 봄의 전령 산수유는 노란 입술로 조잘댄다. 들판의 선두주자인 패랭이꽃 민들레는 아장아장 걸어오고, 매화와 목련도 살포시 실눈을 떴다.
꽃이 피고 진 자리에 어린아이 손가락처럼 예쁜 잎사귀들이 돋아나면 향기가 진저리치는 들판을 무단 횡단하는 5월의 나팔소리가 들렸다. 벌어진 계절 틈으로 여름이 담장을 넘으면 초록 위에 미끄러지던 보리밭은 황금색을 띄우기 시작했다. 양식이 다 떨어져 굴뚝의 연기가 사라진 가난한 집 지붕 위로 별들이 모여들었고, 밤새껏 속살거리던 어느 별은 새벽에 화단에 내려와 도라지꽃으로 피기도 했다. 가파른 보릿고개를 힘들게 넘다 보면 뱃속에선 쪼르륵 소리가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
--- 「초록 오선지」 중에서

비는 하늘과 땅이 편지를 주고받는 그리움의 밀어다. 뜸했던 연인들을 돕는 조력자이고, 목마른 술꾼들의 벗이자 예술의 꽃이다. 김수영 시인은 ‘움직이는 비애’라 했고, 장석주는 ‘끝마무리를 못한 여덟 줄의 詩’라 비유했다. 비는 사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선량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온 손님이다. 때로는 몽상과 회한의 시간을 선물하며 잠시 우울함에 빠지게도 한다. 마음의 악보 위에 내리는 비의 리듬은 심장박동을 뛰게 하여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여 슬그머니 우산을 펴 밖으로 유혹한다.
비는 허공에 그림을 그리는 수채화 물감이고, 현을 조이며 고르는 거문고 소리이다. 시인과 작가에게 영감을 주는 소재이고, 작곡가 앞에 펼쳐지는 오선지 악보가 되기도 하며 신명 나는 타악기 연주자이기도 하다. 비를 피하던 소년과 소녀가 원두막과 수숫단 속에서 사랑의 싹을 틔우던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보슬비는 연인의 목소리를 전해주는 반가운 소식이며, 안개비는 완행열차를 타고 오는 허물없는 친구다. 부슬비가 오는 날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고 빈대떡에 막걸리 한 잔이 생각나게 한다. 빗소리 속에 나를 찾는 요란한 벨이 금방이라도 울릴 것만 같다. 세차게 내리는 작달비는 취한 화가의 붓질처럼 세상의 공백을 빽빽이 채워가기도 한다. 가늘고 굵은 빗줄기끼리 어깨동무를 하여 냇물을 이루고 들녘을 휘돌아 유유히 흘러가면서 강물이 되어 출렁이는 푸른 파도와 만난다.
--- 「마음에 스며드는 비」 중에서

11월은 내가 제일 좋아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기다. 낙엽마저 모두 떨어져 나무 밑동까지 드러나 보이는 모습은 솔직함과 청결함으로 다가온다. 아파트 정원의 감나무, 대추나무가 여러 개씩 달고 있는 까치밥을 새들이 아직은 외면하고 있어 멋스러운 풍경이 된다. 노란 은행잎이나 진홍색의 화살나무의 떨어진 잎은 화사하여 살아 있는 꽃처럼 보인다. 지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피는 꽃이기에 젊은 시절에 요절한 시인의 영혼이 내려온 것 같기도 하다. 잠시라도 감상하고 즐겼으면 좋겠는데 경비원 아저씨들은 쓸어내기에 분주해 아쉽기만 하다.
동짓달은 햇볕이 야위어가고 나무들은 수척해진다. 저녁노을이 지기도 전에 급히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는 골목으로 사라진다. 이때는 뭔가 자꾸 새로운 일을 해야 한다는 부담에 짓눌리지 말고 비우고 지우는 것만으로도 창조가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덜어내고 비우면 다음 봄에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을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가을 낙엽처럼 인생도 과거의 추억이 쌓여 고즈넉한 현재가 된다. 11월은 내가 보일 때까지 자신을 뒤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좀 있는 시기다. 그래서 연초에 계획하고 그리고자 했던 그림들 중 아직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것들이 약속을 지키라고 재촉하고 있다. 월말이 가까워 오자 가을과 겨울이 시간의 영역 다툼을 하고 쓸쓸함이 자주 가부좌를 틀고 있다.
동짓달의 마지막 절기인 소설이 지나자마자 천사의 옷자락 같은 첫눈을 온 천지 흠뻑 뿌려놓았다. 머지않아 구세군의 자선냄비 앞에서 종소리도 울려 퍼질 것이다. 찬바람이 창문을 흔들고 가는 동지의 긴 밤이 오면 내 마음의 시계도 이미 겨울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 「한 해의 환승역 동짓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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