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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에 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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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4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108쪽 | 146g | 125*200*8mm
ISBN13 9791189128685
ISBN10 1189128683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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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의 욕망이 아니어서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오르지 않았다

내 몸속엔
어미 같은 화산도 있고
아비 같은 나무도 있어
그저
꿈꾸고 싶어서
나는 항상 바람과 같이 있었다

나는 수많은 새들이 지저귀지 않아도
저 먼 수평선에
바람의 악보를 그려 넣을 수 있다
--- 「섬」 중에서

동지 전 짧아진 길
마로니에 공원을 서성거리다
서울대병원 오랜 수령의
은행나무 위로 붉어지는
일몰의 하늘을 바라본다

저물 때만 잠시 아름다운
착시에 몸을 기대는 시간

꽃이 피었다 진
수척한 꽃대도
지는 해를 바라보던 나도
한순간 바람에
귀를 비우고 우두커니 서 있다
--- 「일몰에 기대다」 중에서

춥고 피곤한 날
서 푼어치밖에 남지 않은
눈빛으로

섬으로의 망명을 꿈꾸며
카프카를 읽는 오후

11월도 중순
응달진 자작나무 아래
낮게 씨를 달고 있는
시들어버린 꽃을 보다
문득 뜨거움이 울컥 치민다

시들어도 꽃은 우주의 중량을 품고 있구나

짧은 가을을 보내는
마른 꽃의 튼실한 무게
--- 「가을의 무게」 중에서

해운대 미포 앞바다에서 주운
검은 몽돌 한 개
눈물 같은 바닷물이 묻은
돌의 표면에 내 얼굴이 비친다

바닷물보다 짠 삶
쪼그라든 가슴으로
갯바람이 감겨오고

우주의 무게로
심장 안까지 들어오는 바다
천연덕스러운 물결 위로
익명의 갈매기들은 흔들리고

떼울음으로 다가오는 파도
바다의 푸른 이마 위로
흔들리는 흰 시간들
--- 「몽돌」 중에서

꽃 진 능소화 사이로
흐르는 구름의 주름들은

낮달의 자국이 선명한 왼쪽 가슴
푸르게 돋을 별을 기다린다

별자리 옆으로
흐르는 바람은
서로 어깨를 스치며 가고

흐드러지는 별
바람이 지나는 자리마다
우주의 부호가 되어
지상으로 내려온다

어둠에 선명히 새길
마지막 문장이 되기 위해
--- 「별똥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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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을 겪고 난 시인이 이른 곳은 어디일까. 몸의 시간일까. 우주의 시간일까. 몸의 시간이 유한함에 대한 떨림이라면 우주의 시간은 무한함에 대한 울림일 것이다. “시들어도 꽃은 우주의 중량을 품고 있”(「가을의 무게」)음을 포착하는 걸 보면 그는 몸의 시간인 떨림과 우주의 시간인 울림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처럼 비친다. 그의 시를 읽고 있자니 삶의 진의를 느낀 자의 독백 같은, 여기와 저기의 경계를 넘어선 자의 깨달음 같은 통각들이 나지막이 깔린다. 나는 이 통각에 주목한다. 그는 아픔이라는 통각痛覺을 통해 마음속 우주가 열리는 통각通覺으로 나아갔음에 분명하다. 나는 새삼 놀라는 중이다. 목숨이 위태로웠던 사람의 숨결이 이렇듯 정결하고 가지런하다니. 정심淨心의 밑바닥에 고여 흐르는 여유로움을 보라. 그는 이 여유로움 속에 물과 바람과 별과 나무들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우주를 발견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적어 내려가는 시는 “우주의 부호가 되어/지상으로 내려”(「별똥별」)오는 별일 수밖에는 없다. 아마도 그의 시는 저 별이 소멸될 때까지 계속해서 쓰일 것이다. 아니, 저 별이 사라진다 해도 그의 시는 발화될 것이다. 그의 순정함이 기록한 시의 역사는 또다시 누군가의 입김으로 지상에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저 우주의 부호인 별자리가 모든 시인에게 허용되는 것은 아님을. 별이 되어 내리려는 자는 마땅히 스스로, “어둠에 선명히 새길/마지막 문장”(「별똥별」)을 각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정우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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