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나는 쌍둥이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직장을 그만두었다. 나 역시 멀쩡히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갑자기 불나방처럼 미인가 대안학교에 뛰어들었다. 교과서도 없고 시험도 없는 학교! 그런 곳에서 가슴 뛰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대안학교가 나의 도전과 미숙함, 실패까지 다 품어 줄 한가한 곳이 아니었다. 결국 2년 만에 대안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시절의 부적응과 고통이 남편의 아픔에 겹쳐왔다.
--- p.22.
“해가 있을 때 보이는 별이 어디 있어? 해가 안 보여야 보이지. 어두워져야.
--- p.34.
민희는 식당을 차리는 게 꿈이다. 자신의 손으로 디자인한 공간에서 ‘나’로 가득 차게 꾸미고 싶다고 했다. 직접 그린 그림, 직접 만든 인형과 쿠션, 자신의 이야기로 만든 동화책들…. 그곳에서 자신이 초대한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단다.
--- p.56
민경이는 제일 싫어하는 게 ‘발표’인데 그건 ‘두려움’이기 때문이란다. ‘즉흥’적으로 일어나는 사람들의 반응은 미리 자신이 ‘계획’할 수도 ‘연습’할 수도 없기 때문에 두렵다고 했다. 자기가 부족한 것을 알기에 껍질 없이 자신이 드러나는 일이 무섭다고 했다.
--- p.64
“사지선다로 애들을 키우면 대부분 애들이 비슷하게 자라는 거지. 비슷하게 색깔 없이. 싫은 것만 있고 뭘 해야 되는지는 모르고…. 그걸 해서는 안 되는 백 가지 이유는 있는데, 그걸 해야 하는 한 가지 이유가 없는 거야, 인생이.”
--- p.68
내가 오지랖이 너무 넓다! 아이들에게 지금 해주는 것의 반만 해줘도 아무 문제가 없고, 오히려 몸과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 텐데! 내가 ‘잘나서’, 자꾸 ‘못난’ 아이들을 뭐라고 하는 형국이다. 알면서도 안 된다. 마음이 몹시 상하고 지친 다섯 살 인숙은 그렇게 오십이 되었다.
--- p.104
“할아버지, 어떻게 그 높은 산을 맨날 올라가세요?” “저 높은 꼭대기를 바라보면 못 가는 거야.” “네? 그게 무슨 말이예요?” “그냥 서너걸음 앞을 보면서, 걸어가고 또 걸어가는 거지. 그러다 보면 어느새 꼭대기란다.”
--- p.108
가슴 뛰는 삶을 산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있는가? 평생 머리를 쳐들고 꼿꼿하게 살 줄 알았다. 직장을 팽개칠 때조차 ‘그깟 연금!’ 하면서, 나는 내 가슴이 가리키는 방향을 주저 없이 선택했다. 돈이 제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그때까지는 내 삶의 부속품에 불과했다. 돈이 삶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휘저으리라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 p.120
늘 뭔가를 이뤄야 하고, 뭔가를 해내야 하고, 뭔가를 잘해야 하고, 돋보여야 하고, 그래야 가치가 있고…. 이런 생각에 시달리다가 어느 정도 벗어났는데도, 스스로를 가치 없는 사람처럼 여기고, 자꾸 뭔가를 찾으려는 내 모습이 보였다.
--- p.124
사진을 찍으며, 마음속으로 그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모습이 당신의 진짜 모습일까? 와이셔츠 팔목에 새겨진 이름 이니셜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줄 수 있을까? 하기야 그 무엇도 당신이 아닌 것처럼, 모든 게 다 당신이다. 당신은 당신이 걸치고 있는 옷처럼 아버지이고 남편이다. 하지만 그 속에 함께 묻어 있는 바람 같은 자유이기도 하다.
--- p.126
그리고 아들에게도 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들아. 네 힘으로 살아야 한다. 아들아.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야. ’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더이상 죄책감을 필요가 없다고 말해 주었다. 그날 밤 남편과 요가를 하면서 깨달았다. ‘배를 수축해야 가슴이 열린다!’는 것을.
--- p.128
태풍을 뚫고 아들이 미국에서 돌아왔다. 바람이 어찌나 많이 불던지, 무사히 잘 도착한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아들의 인턴 3개월은 순식간에 지났다. 1년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옳게 못 먹고, 그렇게 죽도록 공부했는데…. ‘내 자식이 돈 때문에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 p.158
남편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다’에 집중하겠다고 한다. 남편은 귀도 쫑긋하고 눈이 살아나고 있었다. 얼마나 대단한 기술인지 전혀 모르는 나였지만, ‘드디어 남편도 가슴 뛰는 삶을 사는구나’ 싶었다.
--- p.166
남편은 늘 화두처럼 “어떻게 이 인생이란 여행을 즐길 것인가?”라고 얘기한다. 내 생각보다 남편은 훨씬 여리다. 안 그런 척해도 ‘돈 못 벌어다 준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불쑥불쑥 감정의 덩어리를 내뱉기도 한다. 나도 오랜 세월 선생질을 해서인지 못된 직업병처럼 남편을 훈계하듯 대할 때가 있다. 남편이 답답하게 느껴지면 나도 모르게 말이 거칠어졌다. “아직도 대기업 부장님? 그런 마인드부터 버리고, 좀 더 헝그리하게 모든 걸 척척, 더 바지런히 움직여야 해!”라며, 말을 내뱉은 적도 있다. 며칠 동안 서로 한마디 말도 없었다. 시베리아 벌판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 p.178
“애들한테는 부모가 태양이라는 말이 맞는 거 같아. 스무 살 전까지는 해바라기처럼 부모를 쳐다보다가. 그다음부터는 자기들도 하나의 별이 되는 거지. 태양이었던 부모도 작은 별이 되고. 부모나 자식 모두 각각이 별이 되어서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사는 거지. 서로의 중력장을 갖고….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 부딪히니, 적당하게 떨어져 서로를 쳐다보고….”
--- p.198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나와 남편. 누가 서로를 더 많이 응시했을까? 내가 카메라를 조작하고, 프레임을 구성하고,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 진땀을 빼는 동안, 혹 남편은 나를 기다리며, 더 오랫동안 나를 응시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도 그의 맨눈으로! 그래서일까? 요즘은 사진을 찍다 보면, 찍는 나를 바라보는 그가 보인다.
--- p.212
“요즘 가슴이 좀 편해진 것 같아. 숨쉬는 게 좋아. 느낌이 있어. 특별히 행복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불행하지도 않고…. 그냥 숨쉬는 게 좋아. 참 편안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가슴속 공간이 조금은 넓어진 것 같아.”
--- p.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