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주방에서 아내가 부른다. 한걸음에 가 앉는다. 식탁엔 갓 뚜껑을 연 큼직한 오븐에서 모락모락 솟는 김이 확 얼굴을 끼얹는다. 금세 김이 걷히고 드러난 굵직굵직 썰어 놓은 허연 양파, 김치, 흑돼지오겹살, 팽이버섯, 두부, 괜찮은 조합이다. 아내가 주걱으로 휘저으며 앞 접시에 서너 번 떠 넣는다. 침이 돈다.
맨 처음 집어든 것은 오겹살, 아내는 도톰하게 칼질해 깊은 맛을 낸다. 까만 가죽에 잇댄 비곗살에 눈이 가 있다. 비방이 별거 아닌 듯하다. “돼지고긴 한 점을 먹어도 이렇게 썰어야 푸져요.” 그래서인가. 평생 돼지고기를 끊임없이 먹는데 질리지 않는다. 육식 체질인 식성을 읽어 주니, 이런 은혜로울 데가. “양파가 몸에 좋으니 골고루 먹어요.” 으레 한마디 할 걸 알아 반 박자 앞서 젓가락이 양파에 닿아 있다. 살짝 익힌 거라 향이 그냥 남아 있다. 살강거리는데 거슬리지 않는다. 음식은 씹히는 맛이 있어야지. 팽이버섯도 보드라운 게 제 맛을 거든다. 넉넉히 넣은 두부가 김치와 협동으로 찌개 맛의 핵심에 기여하는 듯, 오늘 따라 맛이 별나다.
“햐, 김치찌개, 죽인다.” 젓가락 두세 번 올리고 감탄을 터트린다. “그래요? 당신 맛있다니까 나도 맛이 돋아나는 것 같네.” 대답보다 아내의 함박웃음에 눈이 꽂힌다. 활짝 따라 웃는 아내.
며칠 만인가. 고사리 볶음, 고등어조림, 감자볶음, 계란반숙. 아내는 이러다 어느 주기에 김치찌개를 끓인다. 아내의 묵은 손맛을 인정한다. 아내는 조미료를 치지 않는다. 그러고 맛깔을 내는 비법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자주 엄지를 세워 코밑으로 들이대곤 한다.
“짜지 않아요?”
“안 짠데. 입맛에 딱 맞은 걸.”
“당신 입맛에 맞는다는 걸 보니 좀 짠 것 같은데….”
“그냥 먹어요. 맛있게 먹으면 되는 건데 뭘.”
몇 마디 주고받는 새, 앞 접시가 바닥이 났다. 공기 밥도 싹쓸이다. 국 없이, 아침식사 뚝딱.
우유에 커피 타 가열해 마시는 티타임. 밖엔 강풍이 지나지만 차향이 유별나다. 마주 보며 웃는다.
“잘 먹었어요. 김치찌개 덕분에….”
“무슨….”
한 끼 해결했다. 설거지하는 아내의 뒷모습이 평안한 아침.
(2019)
---「김치찌개」중에서
날이 새기 시작하는 새벽이 첫새벽입니다. 신새벽이라 쓰면 사전에 첫새벽의 잘못이라 나옵니다. 글을 쓰다 후다닥 바로잡은 적이 있어요. 동살 터 오는 정갈하고 순수한 시간에 우리말을 제대로 쓰지 못해 온 자신이 부끄러웠지요. 평생 국어 선생을 하고 글쓰기에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참 민망했습니다. 여전히 표기법이며 띄어쓰기에서 오류를 벗어나지 못하는 수가 있어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말을 글로 쓰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아요. 그래서 글 몇 줄 쓰면서 국어사전을 옆에 끼고 삽니다. 동아 『새국어사전』이 꽤 오래돼 나달거립니다. 이 사전으로 해결이 안될 때면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기대게 됩니다. 상·중·하로 된 7308쪽짜리 묵직한 사전(1999)입니다. 글이야 어떻든 우리글을 바르게 써야 한다는 일념에는 흔들림이 없지요. 글 쓰는 사람의 마지막 고집일 겁니다.
오늘 ‘첫새벽’이란 말을 처음 열어 보았어요. 거기, “첫새벽이라 떠나는 것은 보지 못했소이다만 강쇠를 깨워서 운봉 어른 뫼시고 먼저 가라 이르더랍니다.” 박경리의 『토지』에서 인용한 용례가 나와 있더군요. 이쯤 되면 낯선 말도 눈을 반짝이며 내 안의 작은 곳간으로 들어와 자리를 틉니다. 우리말과의 해후는 언제나 숨찰 만큼 기쁩니다. 그 순간, 가슴이 쿵쾅거리곤 합니다. 어린 아이가 따로 없지요.
나는 대체로 3시쯤 잠에서 깹니다. 오래된 버릇입니다. 첫새벽인 셈이지요. 두어 번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젖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내리면 정신이 번쩍 듭니다. 곧바로 각성에 드는 낌새를 느낄 수 있어요. 몸은 민감하게 반응하는 유기적인 조직체이지요. 세포들이 돌기처럼 일어서면서 나를 어제의 경계에서 오늘로 틀어 앉힙니다. 골똘하던 생각의 끝자락을 꺼당겨 섬세히 다듬거나 몇 줄 쓰던 글에 손이 가 있기도 합니다. 키보드 위의 손에 속도감을 느낄 때가 바로 첫새벽이지요. 첫새벽은 첫 깨어남과 같은 맥락이란 생각이 듭니다. 몸도 머리도 밤새 쉬었으니 정상 작동하게 되는 것일 텝니다. 제법 돌아가지요. 이런 선순환구조에 몸을 놓으면 때로 신바람이 납니다. 틈을 놓치지 않고 유용하게 쓸 때 글이 온전해 지는 걸 경험해 옵니다.
우수를 며칠 앞둔 날, 오늘도 첫새벽에 잠을 물렸습니다. 동창을 열었더니 추적이며 뿌리는 빗소리입니다. 큰비는 아니지만 봄을 일찌감치 시샘하는 꽃샘 예고편인 것 같네요. 한겨울은 따스해도 꽃샘은 혹독하잖아요. 방에 밀려든 백매 향이 위안이라 묵연히 책상 앞에 앉기로 합니다. 재활용지로 맨 백지 노트를 받아 앉습니다. 요즘 들어 시가 잘되지 않아 몹시 부대낍니다. 소재의 빈곤을 내세우나 실은 이미지의 고갈입니다. 정서가 촉촉이 젖어 있어야 하는데, 갈바람에 서걱대는 마른 잎처럼 사물에는 닿되 내게로 일렁여 오며 감흥이 일지 않으니 심각한 일입니다. 하지만 내게로 달려드는 파도의 이랑을 기어이 경작할 겁니다. 밀물과 썰물의 운율을 조율해야지요. 시는 내게 정인인데 떠나보낼 수 있나요.
만년필의 굵직한 궤적이 한 편의 시를 받아쓸 때의 희열은 무엇에도 비할 수가 없지요. 그걸 워드로 쳐 가며 시나브로 한 편의 시가 완성되는 과정을 나는 즐깁니다. 잘된 시인가 하는 것은 다음 문제이지요. 첫새벽에 시 한 편을 쓰고 나면 아침이 신납니다.
(2019)
---「첫새벽에」중에서
‘인생은 초로’란 말을 아잇적 들은 기억이 난다. 동네 한 어른이 무슨 말 끝에 해 놓고는 한숨이 뒤따랐다. 거푸 내쉰 한숨이었다. 숨이 꺼지기라도 할 듯 긴 한숨이었다. 뜻을 해득하진 못했지만 말의 뒤가 쓸쓸하게 느껴졌다. ‘초로, 초로’ 입안에서 몇 번 오물거리다 삼켜 버렸지만 뭔가 받지 않는 음식처럼 느글거렸다.
얼마 뒤, 몇 학년 전과지도서였던가. 낱말의 뜻을 제대로 알게 됐다. ‘풀에 맺힌 이슬’, 풀 초 이슬 로, 그럴싸하다. 그 뜻이 머릿속으로 확 꽂혔다. 아, 풀잎에 맺힌 이슬이 햇살에 금세 사라진다는 뜻이로구나. 첫소리 ‘ㅊ’만 거셀 뿐 모음, ‘ㄹ’, 모음으로 이어져 발음이 부드럽고 밝고 맑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번 소리 내어 읽다 보니 지니고 있는 뜻보다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 더 끌렸던 것 같다. 어릴 때다. 소리에 뜻이 묻혀 버려 더 이상 감정이 꿈틀거리거나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나이 들면서 이 말이 심심찮게 의식 속을 들락거리는 게 아닌가. 그것은 인생을 비유한 ‘풀에 맺힌 이슬’의 실체에 대한 사유의 단초가 됐다. 그 이슬이란 게 한순간의 존재인가. 아침 해가 떠올라 풀잎을 비추면 이내 자취를 감추고 마는 것, 이슬이 햇살 속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찰나. 그렇게 가뭇없이 잦아드는 이슬이 있어 아침햇살이 그토록 유난하게도 찬연한가.
아득한 옛 선인의 수사적 비유에 감탄한다. 인생은 초로라 하면 은유, 인생은 초로 같다고 하면 직유다. 둘 사이에 정서적 거리는 없는 듯 분명 있다. ‘초로다’는 인생에 밀착돼 등식을 구성하는 데 비해, ‘초로 같다’는 인생과 비슷하다는 것이니 둘 사이에 틈새가 생긴다. 그러고 보니 꽤 섬세한 표현이다. 애초 두 말의 조립에 어지간히 신경이 쓰였을 것이란 느낌이 든다. 덧없다, 허무하다는 말이다. 산다고 아등바등 허덕거리다 보니 어느새 한 생이 뉘엿뉘엿 지는 해로 서편 마루에 기울었지 않은가. 노을을 바라보며 인생은 초로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한국인은 트로트를 잘해 다들 가수라지만 감정 표현에도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지식이 짧아 외국어의 묘사에 어둡지만, 아마 ‘인생은 초로’ 같은 표현은 없을지도 모른다. 인생과 사물의 성정을 융합한 이런 사실적 표현.
12월이다. 그리고 2일. 달력 마지막 장을 넘기자 그새 또 이틀이 지났다. 참 빠른 게 세월이다. 한숨 쉴 겨를도 없이 휙휙 바람의 등을 타고 지나는 시간의 흐름 앞에 무얼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려놓았다. 퍼뜩 ‘쏜 살 같다’는 말이 스쳐 지난다. 이 또한 기가 막히게 적절한 수사다. 빨리 흘러가는 시간의 속성을 이 이상 역동적으로 나타낼 수 있으랴. 연상 속으로 희한한 말의 조합이 탄생했다. ‘쏜 살 같으니 인생은 초로’, 결국 이렇게 연합되는 두 말이었구나. 여기 덧붙일 수식은 찾지 못하겠다. 세월이 쏜 살같이 흐르니 인생은 초로일 수밖에 없으니….
이 한 달이 지나면 다시 해가 바뀌고 책상 앞으로 2020 경자년 새 달력이 걸린다. 정초에 한때 흰쥐 띠의 해라며 달뜨다 이내 가라앉게 될 테고, 계절은 늘 그 행보로 가던 길을 내달릴 것이다. 쏜 살같이. 그러고 다시 맞는 세밑 한 해의 벼랑 끝에서 인생은 초로라 뇌까리고 있으리라. 정신 번쩍 든다. 눈앞을 지나는 시간의 쏜 살에 눈을 고정시켜야겠다. 풀에 맺힌 이슬은 사라지지만 아침마다 다시 맺힌다.
(2019)
---「초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