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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5월 08일
쪽수, 무게, 크기 170쪽 | 180g | 120*188*11mm
ISBN13 9788932036250
ISBN10 893203625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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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에, 나는 여자들을 잘 몰랐다. 게다가 지금도 여전히 잘 모른다. 남자들도 그렇고,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안다고 할 수 있는 게, 내 고통들뿐이다. 나는 매일같이, 내 모든 고통을 생각하지만, 그 생각은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순식간에 사라지는데, 그렇다고 그 고통들이 전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나는 이것들도, 그러니까 내 고통들도 잘 모른다. 그건 필시 내가 고통 그 자체만은 아니라는 데서 기인한 일일 것이다. 야아 이렇게 교활할 수가 있나. 그래서 난 거기에서 떠나, 다른 행성의, 놀라움이 있는 곳까지, 찬미가 있는 곳까지 간다. 드문 일이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바보가 아냐, 인생은.
--- 「첫사랑」 중에서

사랑이 당신들을 망친다는 것,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무슨 사랑을 말하는 걸까? 열정적인 사랑?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육감적인 사랑 하면 열정적인 사랑이지. 안 그래? 아니면 내가 다른 종류의 사랑과 혼동하고 있나? 사랑에는 정말 여러 종류가 있잖아, 그치? 상대적으로 아주 아름다운 사랑들도 있고 말이야, 안 그래? 예컨대 플라토닉 러브, 이게 방금 생각난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사심 없는 사랑이다. 어쩌면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이야말로 플라토닉 러브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보긴 어렵다. 순수하고 사심 없이 그녀를 사랑했다면 암소가 싸지른 오래된 똥 덩어리들에다가 그녀의 이름을 썼겠는가? 더군다나 다 쓴 다음에 입에 넣고 쪽쪽 빨았던, 내 손가락으로?
--- 「첫사랑」 중에서

새벽이 어슴푸레 밝아왔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되도록 빨리 밝은 곳으로 가려고, 어림잡아, 해 뜨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나는 바다의 수평선이나, 사막의 지평선을 원했어야 했다. 내가 밖에 있을 때면, 아침에는, 태양을 맞이하러 가고, 저녁에는, 내가 밖에 있을 때면, 태양을 따라, 망자들의 집에까지 간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얼마든지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는데. 어쩌면 다음번에는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그 이야기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보게 될 거다.
--- 「추방자」 중에서

그러다가 마침내, 황소처럼, 무릎을 먼저 털썩 꿇은 다음, 앞으로 엎어지면서, 쓰러지기 직전에, 나는 군중들 가운데 있었다. 나는 의식을 잃지는 않았는데, 내가, 내가 의식을 잃게 된다면 그건 의식을 도로 되찾기 위해서는 아닐 거다. 사람들의 배려는 분명 감동적이었다, 나를 밟고 지나가는 일은 가능한 한 피하면서도, 나한테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는데, 바로 그 맛에 내가 나왔던 거다. 인간들의 발아래서, 밤과 고요함에 잔뜩 젖어도, 만일 날이 밝는다면 빛의 심연의 밑바닥에서도, 나는 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피곤해서 적절한 말을 찾을 수가 없다, 그래 지체 없이 원래대로 돌아왔고, 군중들이 물러가면서, 빛이 돌아온 덕에, 조금 전에 경탄을 불러일으켰던 바로 그 빈터로 내가 돌아와 있는지 알려고 아스팔트에서 굳이 고개를 들 필요가 없었다. 친근해진 아니면 적어도 아무 감정 없는 그 포석에 누운 채, 여기 그냥 있어, 나는 말했다, 눈을 뜨지 마, 사마리아인이 오기를, 아니면 날이 밝기를 그래서 경찰관들이 아니면 또 알아 어느 구세군이 오기를 기다려. 그런데 참 나는 또다시 일어나더니, 계속해서 오르막길인 대로를 따라, 내 길도 아닌 길을 또 가기 시작했다.
--- 「진정제」 중에서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거기에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단언컨대, 나는 내 상자 안에서 잘 있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내가 잘 지내는지 필요한 게 없는지 물어보러 오지 않았고, 올 수도 없었다는 사실에, 나는 그렇게 속상하지는 않았다. 나는 잘 지냈다, 그렇고말고, 완전히 잘 지냈지, 그리고 상태가 더 나빠지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도 거의 느끼지 않았다. 필수품에 관해서는, 말하자면 내 수준에 맞게 줄였는데, 당시 관점에서 봤을 때는, 그 어떤 구호품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질적으로 매우 우수했다. 부지불식간에, 아무리 어설프고 허망하게 존재했더라도,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끼는 일은, 옛날 같았으면 나를 감동시키는 선물이었다. 누구나 미개한 존재로 변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자신이 제정신인지 가끔씩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 「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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