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4월 10일 영국을 떠나며 우렁찬 기적을 울리던 타이타닉 호 안에서 약혼자가 선물한 바이올린을 턱 밑에 대고 가볍게 활을 움직이면서 대서양의 밤하늘을 매만지던 하틀리의 바이올린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닷새 뒤 그가 차가운 북대서양 위에서 사람들의 아우성을 배경음악 삼아 연주하던 ‘내 주를 가까이 함은’이란 노래를, 그리고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배 위에서 바이올린을 가방에 넣어 자신의 목에 걸면서 “마리아, 안녕.” 하고 중얼거렸을 한 남자도 함께.
--- 「침몰하지 않는 사랑 I 타이타닉에 울려퍼진 사랑」 중에서
그런데 언제부턴가 남자는 오지 않고 여자만 같은 시간에 강릉행 열차를 타고 와서 5분 동안을 우두커니 플랫폼에 서 있다가 영주행 열차를 타고 돌아가더라는 겁니다. 계속 그 일이 반복되자 역무원이 물어 봤대요. “아가씨 그 남자 분은 요즘 왜 안 오시우” 아 그런데 대답이… 아이고 맙소사. 광산에 사고가 나서 그만 남자가 막장 탄가루 속에서 죽었다는 겁니다. 남자가 죽은 걸 알고도 여자는 주말마다 해사하게 웃으며 영주행 열차를 타고 오던 강원도 남자를 잊을 수가 없었고, 주말마다 혼자라도 승부역에 나타났던 거예요. 돌아오지 않을 연인을 그리워하면서 말이지. 그러기를 한참, 여자도 승부역에 나타나지 않았대요. 역무원들은 세월이 약이라고 죽은 애인 잊고 새로운 사람 만났나 보다 하고 잘 살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지 뭡니까. 일요일의 승부역에 나타나던 그 처자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 「기차는 사랑을 싣고 봉성역과 승부역의 사랑 이야기정신」 중에서
이 스웨덴 남녀는 운명의 9월 28일 에스토니아 호에서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서로 호감을 느껴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발트 해의 밤을 지새고 있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새벽에 하늘이 무너지는 난리를 당한 겁니다. 삽시간에 배가 기울고 물이 무릎까지 차올라왔을 때 켄트가 사라를 불렀다지요. “사라!” 충격과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던 사라가 켄트를 돌아봤을 때 켄트는 뜻밖의 말을 토해 냅니다. “여기서 살아남으면요. 스톡홀름에서 저녁 같이 해요.”
--- 「침몰하지 않는 사랑 II 가라앉는 배, 떠오르는 사랑」 중에서
“사랑과 예술은 서로를 파멸시키는 존재다.”는 이사도라 자신의 뇌까림처럼 이 두 자긍심 높았던 예술적 천재는 뜨거워질수록 서로에게 화상을 입혔고 깊어질수록 서로의 가슴에 아물기 힘든 상처를 남겼습니다. 최고급 호텔에서 술주정을 하며 기물들을 박살내고 몇 층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만용을 부리며 망나니짓을 하는 예세닌과 그에 맞서 미친 사람처럼 싸우다가도 “이 금발의 천사가 내 남편입니다.”라고 감쌌던 이사도라. “당신의 춤은 당신의 몸뚱이가 없어지면 사라지지만 내 시는 영원히 남을 거야!”라고 억지를 부리다가 아내를 죽여 버리겠다고 권총을 겨누기도 했던 남편, 그러다가 정신질환자 수용소에 보내진 예세닌을 빼내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던 이사도라. 둘은 나란히 만신창이가 돼 갔고 결혼 생활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 「이사도라 던컨의 사랑 사랑보다 자유」 중에서
그 마음이 수천 년 시간을 넘어 오늘에 이어지고 공감되었기 때문일까요. ‘발다로의 연인’이라 이름 붙은 유골들은 평소 하던 방식대로 조각조각 ‘채집’되지 않고 바닥 전체를 들어내서 박물관으로 옮겨집니다. 학자들과 관계자들 역시 “수천 년 헤어지지 않은 그들을 떨어지게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던 것이죠.
--- 「체르노빌과 발다로의 연인 그대와 영원히 함께 가리」 중에서
상상하면 절로 웃음이 납니다. 자장면 시켜 먹은 다음 중국집 골방에 앉아서 화교 아저씨에게 “자오즈민, 그대를 처음 만난 날…” 운운하는 (제 추정입니다.) 낯 뜨거운 문장을 읊어 대고 화교 아저씨가 분주히 한자로 번역하는 모습, 로맨틱 코미디의 한 장면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안재형은 중국집 아저씨에게만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맹렬히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지요. 후일 중국 기자들로부터 “중국어를 가장 잘하는 외국 선수”로 인정받게 될 만큼 말입니다.
--- 「자오즈민과 안재형 국경을 넘어, 장벽을 넘어」 중에서
경상남도 마산시 산호동에 가면 1930년대 지어진 일본식 가옥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오랜 세월 풍상을 겪고 화마(火魔)도 휩쓸고 지나가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이 집은 지화련이 임화를 간호하다 결핵에 걸렸을 때요양차 내려와 묵었던, 지하련의 셋째 오빠 이상조의 집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녀는 임화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리움을 달랬고, 여러편의 소설을 써 내기도 했습니다. 이상조와 임화는 바다낚시를 함께 즐기던 절친한 친구사이였으니 이 집은 임화와 지하련은 생애에서 가장 안온하고 즐거운 그들만의 시간을 누렸던 공간일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연인들, 임화와 지하련의 앙상한 흔적이나마 보존했으면 하는 마음 간곡합니다만, 워낙 무심한 나라와 사람들이기에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벌써 없어졌는지도 모르죠.) 임화와 지하련. 두 사람이 저 세상에서는 무사하고 태평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둘의 사랑은 너무나도 험난한 시대에 피어났다가 허무하게 지고 말았으니까요.
--- 「임화와 지하련 남북이 지워버린 사랑」 중에서
태평양 전쟁 말기에 극심한 생활고 때문에 아내가 젖먹이 아들을 들쳐 업고 뙤약볕 밑에서 일을 해야 하던 시절, 갑자기 박수근이 양산을 들고 나타납니다. 이건 당신 꺼라며. 끼니도 잇기 힘든 판에 웬 양산이냐, 이게 어찌 된 거냐고 캐묻는 아내 앞에서 박수근의 맥없는 대답은 이랬습니다. “당신이 뙤약볕에서 너무 힘들게 오가는 게 가슴 아파서…. 어느 상점에서… 훔쳐 온 거요.” 아내는 “눈물이 흐르고 가슴에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으면서도 한숨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 마음이야 가슴 속을 박박 긁어 고마워한들 답이 될까만, 저렇게 마음 약한 사람이 자신을 위해 도둑질을 했다는 사실이 비수가 되어 박힌 거지요. 부부는 실랑이를 벌입니다. “일본 사람 가게요. 우리나라 빼앗고 떼돈을 벌고 있는 본 가게 것이니 그냥 쓰시오.” “안돼요 저는 그거 못써요. 돌려주세요.”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 남편이 돌아간 뒤에도 아내가 “그 뜨거운 사랑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라고 술회하기도 했었죠.
--- 「박수근과 김복순 천생연분이란 이런 것」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