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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 다 카포 알 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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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5월 11일
쪽수, 무게, 크기 161쪽 | 192g | 128*204*11mm
ISBN13 9791188694617
ISBN10 1188694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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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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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끄트머리에 앉아 바라볼 노을을 한 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음악으로 당신에게

이번 생은 내내 은둔하고 있는 삶을 찾아 헤매는 중이야
섬으로 산으로 때론 서점으로

한없이 걷다가 청춘의 골목에 위치한 작고 아늑한 까페에서 우린 만난 적 있지
어디에서 오셨나요 묻는 당신의 입술을 기억해
나는 당신은 어디로 가시나요 라고 대답했지

난파선을 타고 오는 길이에요
눈이 오는 곳으로 가야 해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도 흥얼거리고 있는 노래가 흐르고 있었고
우리 사이로 펄펄 내리던 분위기를 기억해
하지만 우리의 무거운 가방들은 주인을 오래 기다리지 못하고 재촉했어

우린 점을 치듯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았지

당신을 찾을 수 있을까요
서로 편지를 쓰도록 해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순간으로 우려낸 차를 마신 뒤 우리는
각자의 가방을 메고 길을 나섰어

말 없는 음악을 타고 떠나온 그 길이
내 생에 가장 소박한 악보로 남아 있네

나는 여전히 삶을 찾지 못했고 어쩌면 상실된 것을 찾으려 헤매면서
원래부터 내가 잃어버린 건 없었거나
헤매다가 더 많은 걸 상실했는지도 몰라

하지만 내겐 사랑할 때마다 들려오는 멜로디 있으니
걷다가 만난 쉬기 좋은 그늘에서면 이렇게 연주를 하고 있지

생의 끄트머리에 앉아 바라볼 노을을 한 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음악으로 당신에게
--- 「안단테 아름답게, 걸음걸이의 속도로」 중에서

때로는 공허하고 때로는 아늑한
침묵과 눈시울의 연못이 장맛비 내리듯 하염없이 차오르다가
어느 순간 온 아래로
둑이 터지며 흘러넘친다

동시에 몇 천 광년을 깜박이며 날아온 소행성이
마침내 도달해 지구에 부딪히고 언어가 뜨겁게 타오르며 열린 창문으로 들어와
가난한 시인의 가슴과 충돌한다

벌이 최초이자 최후의 일격을 목숨과 맞바꿀 때

건반을 두들기던 손이 잠시 멈추면 어떤 관객은 잠깐 숨을 쉬겠으며 누군가는 마지막을 착각하고 이별하겠지만
연주자는 악보를 거슬러 올라 다시 연주를 한다

빠르게 되감기는 일필휘지의 붓 경經으로 읽었던 편지들이 쓰이기 전으로
계절은 세탁기 돌듯이 돌아가고 옥상에 넌 속옷들은 마르던 속도로 젖는다

느티나무 아래 소녀는 막 훌라우프를 돌리려 한다
그 그늘이 지기까지 비가 얼마나 내렸으며 해는 어떤 풍경들을 지나왔을까

육지의 기억을 챙겨 배로 오르는 선원의 발소리와
잘 다녀와요 먼저 출근하는 이에게 하는 입맞춤
그래 오늘은 그 소리가 유독 아름다워
우리가 만날 수 있을 거 같은 예감이 들어

명령 없는 연서가 화사하게 피어 배달되고
온갖 날개달린 생명들이 껍질을 벗고 나온다

오로라가 극지로 당도하는 순간 두 얼굴이 가까워지다가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숲 속의 족장이 아이들을 모은다

이제껏 들려준 얘기는 잊어버려도 괜찮단다
자 다함께 반짝이는 노래를 부르자

우리가 부른 노래는 끝이 나도 우리가 만든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거란다
--- 「다 카포 알 피네, 처음부터 끝까지」 중에서

창문을 열자 눈이 쏟아져 들어왔다. 순식간에 콧등 과 양 볼에 눈이 내려앉았다. 눈은 소리 없이 쌓이면서 세상의 소리들을 증폭시킨다. 거리를 걸으면 뽀드득 뽀드득 쌓인 눈이 밟히며 비명을 질렀다. 하얗게 주차된 차들 아래에는 평소보다 더욱 명백한 어둠이. 크기가 제각각인 결정체들은 검정색 외투 위로 뿌려 져 빛나고. 조금 더 고요하고 조금 더 소란스러운 세 계. 눈을 잡으려 손을 뻗으면. 물기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마음. 눈이 내리는 거리를 걷다 문을 열고 들어 가려면 먼저 온 몸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야한다. 그렇게 떨어진 눈은 다시 거리에 쌓이고. 쌓인 눈이 내 리는 눈과 맺는 연대. 창 안에서 밖을 보면 음소거 된 풍경. 저 눈들은 어디서 와서 이 도시를 잠시 덮어주는가. 녹아 사라질 때 그들은 작별인사도 외마디 비명도 없이. 흰색 보다는 회색에 가까운. 내리는 눈을 보 면 내리는 감정들. 그 감정들 또한 눈처럼 말이 없고. 다만 어떤 사람이 지나갔는지 발자국들이 고발하고. 죄책감도 안도하는 마음도 눈에게 모조리 덮이고 드러나는데. 다시 녹았다가. 사르륵. 동네 아이들이 어느새 눈사람을 만들었다. 뭉쳐진 눈과 내리는 눈은 무엇이 다른가. 뭉친 생활과 조용히 내리는 감각은 어떻게 다르며. 우리의 마음은 어디서 쌓이고 말들은 언제 녹아 사라지나. 지금 발자국을 남기며 내리는 눈을 맞고 있는 이 누굴까. 눈이 내려 더욱 밝고 더욱 희미한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지나고 있나.
--- 「백색 음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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