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와 개혁을 향한 열망으로 한국 예술가들은 새로운 형태의 예술적 표현을 추구했다. 그러나 일본제국에 병탄되면서 한국의 미술과 문화는 식민지에 대한 일본의 정치적 의제와 분리될 수 없었다. 일본 정부는 해외여행을 제한했고, 이 때문에 한국 예술가들은 유럽에서 서구의 대가들에게서 직접 배우기 어려웠다. 그들은 유럽 대신에 도쿄로 갔다. 파리에서 훈련받은 일본인 미술가들이 도쿄에서 한국인 예술가들을 가르쳤다. 이는 한국 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형태의 예술, 특히 유화의 이념적, 양식적 기반이 확립된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그러했다. 한국 미술가들이 주로 일본을 통해 근대 유럽 미술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 근대미술의 초기 형성기를 둘러싼 논란은 식민통치자의 역할을 부각하여 친일과 반일 논쟁으로 미술계를 양분하곤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복잡한 상황은 이 시기의 문화적 환경, 예술가들의 동기, 작품들의 의미에 대한 중층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 p.66
1948년에 남한과 북한에 각각 정부가 수립된 뒤로 미술과 문화는 양쪽 지역에서 승인된 이데올로기의 보급과 대중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양상은 특히 북한에서 두드러졌다. 북한에서는 예술가와 지식인의 육성에 관심을 기울였고, 문화와 교육 정책의 개발에 공을 들였다. 1945년 12월에 북한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로 선출된 김일성은 국가의 문화적 의제를 위한 토대를 놓는 과정에서 예술의 목적, 주제 및 방식의 적절한 형식에 관한 성명을 여럿 발표했는데, 이는 예술에 대한 중요한 지시가 되었다. 해방 후 서울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술계 인사들이 북한의 미술계를 주도했고, 남한과는 크게 다른 북한 특유의 미술 양식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남한과 북한 미술의 차이는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가 된 1948년 9월 이후로 더욱 뚜렷해졌다. --- p.139
단색화 화가들은 저마다 다양한 방식을 구사했다. 그들은 캔버스를 물로 적시고, 물감을 화면 뒤쪽에서 앞쪽으로 밀어내고, 종이를 찢어 붙이고, 여타의 방식을 구사하여 전통적인 ‘회화’의 경계를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중략) 1970년대 중반에 이것은 한국적 여건에서 비롯된 전통적인 동아시아 철학과 관련지어 이해되었다. 그 좋은 예는 1970년대 초반부터 제작하기 시작했던 윤형근(1928-2007)의 독특한 〈청다〉 연작에 대한 반응이다. 그는 엄버와 울트라마린 물감을 테레빈과 섞어서는 몇 주와 몇 달에 걸쳐서 물감층을 반복해서 쌓았다. 색의 각 층은 서로 다른 속도로 캔버스나 삼(마)에 스며들어 가장자리가 흐릿한, 색상이 미묘하게 변화하는 색면을 만들었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은 성격이 다른 재료를 의식적으로 조작한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나게’ 한 것이었다. 1975년 12월 서울의 문헌화랑에서 개최된 윤형근의 제4회 개인전에 대한 《동아일보》의 리뷰는 윤형근의 접근이 ‘모든 감각과 감정을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동아시아의 정신세계와 무(無)를 반영했다고 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비평가들은 서양의 모노크롬 미술과 단색화를 다른 것으로 규정할 수 있었다. --- p.214
민중미술은 양식적인 특징으로 정의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민중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미술인들이 목판화, 걸개그림, 벽화부터 캔버스, 천, 종이에 그린 유화와 수묵화까지 다양한 형식과 매체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민중미술의 역사적 의의는 사회적, 정치적 사건과 이슈에 직접적이고 비판적으로 참여한 것이었다. 프랭크 호프만의 말을 빌리면 ‘한반도의 역사에서 이전까지, 또 아마도 그 밖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미술이 한 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원동력으로서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 경우는 없다.’ 미술이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대한 비판의 수단이 되면서, 민중미술인들이 ‘현실’을 시각적으로 해석한 방식은 특히 중요하다. 민중미술인들의 방식은 뜨거운 논쟁적인 이슈가 되었고, 비평가들은 민중미술을 한국 미술에서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결정적인 지표로 인식했다. 민중미술인들이 한국의 과거에 대해 어떤 의미에서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이해했다는 점과, 민중을 대변하는 문화적이고 시각적인 언어를 구사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 p.231
전통과 새로운 것, 그리고 한국적인 것과 외국(특히 미국)에서 온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대조는 신학철이 1987년에 그린 〈한국 근대사〉 연작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은 배경에 북한과 중국 사이의 경계로서 문화적, 역사적으로 중요한 명소인 백두산이 보이고, 그 앞쪽에는 마을 사람들이 전통적인 옷차림으로 춤추고 먹는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전경에는 농부들이 새롭고 풍요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논농사를 짓고 있다. 써레질하는 소가 미국의 소비 상품인 담뱃갑, 코카콜라 병, 한국전쟁의 잔재인 탱크와 철조망을 뒤엎고 있다. 바로 앞에는 겁에 질린 ‘샘 아저씨(미국을 의인화한 상징)’가 미사일에 매달려 있다. 신학철은 이 그림이 고향의 행복한 봄에 대한 기억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두환 정부는 달리 생각하고 이 그림을 압수했다. 이 그림은 북한에 우호적인 시각에서 남한과 미국을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되었고, 신학철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236
김인순의 그림은 1906년에 처음으로 등장하여 일제강점기에 널리 사용되었던 용어를 제목으로 삼았다. 일본의 식민지 교육 전략의 일환으로 장려되었던 ‘현모양처’의 이데올로기는 복종하는 주체, 능률적이고 순종적인 노동력을 양성하려는 목적에 부합했다.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나온 ‘료사이겐보(良妻賢母)’에 대한 이데올로기와 통했지만, 조선의 가부장제에서 내세웠던 ‘부덕(婦德)’이라는 유교적 관념과도 겹쳤다. 김인순의 그림은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과 ‘현모양처’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그림 속에서 익명의 여성이 쓰고 있는 학사모는 그저 여성을 짓누르는 구실만을 할 뿐이다. --- p.253
양혜규의 접근 방식은 시기적절했다. 작품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종종 아주 먼 거리를 옮기고 보관하는 문제는 국제 예술 현장에서 활동하는 동시대 예술가들이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늘 레지던시에서 레지던시로 움직이고, 비엔날레와 아트페어 및 전시 사이를 오가며, 그들은 점점 더 유목적이 되고, 대체로 자국민보다 예술가들끼리 서로 공통점을 지닌 개인들로 이뤄진 엘리트 집단을 구성한다. --- p.334
젊은 세대의 미술인들은 스스로를 개인으로 여기면서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문화적 관습과 관련된 사회적, 문화적, 국가적인 제한에 얽매이지 않는다. 해체라는 것은 그들이 예술의 개념에 도전하고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위계질서를 전복시키는 중요한 주제이다. 그들에게 절대적인 진실은 존재하지 않고, 서로 다른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현실의 상호 관련만이 있을 뿐이다. 예술은 더 이상 집단에서 정의된 답을 제시하지 않고 개인과 주관적인 탐구를 추구한다. 이전 세대의 미술인들을 이끌었던 국가적 정체성은 이론적으로 존립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미술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 p.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