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 따라 동작 하나하나를 익히는 어린 여성의 모습에서 미소란 찾아볼 수 없다. 사진 곳곳엔 자신의 몸을 만지는 외부에 대한 경계심도 느껴진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그릇된 훈육을 명쾌히 지적한다고 단정짓기엔 작업의 절차를 챙겨봐야 한다. 좀 더 작업을 쪼개어보자면 마르고에게 사진은 몸에서 몸짓이란 단계로 나아가 몸짓의 유형을 기록하는 실천이다. 그다음 몸짓과 성정체성의 연계를 통해 사회적 압박에 시달려온 이들의 두려움을 조심스레 가시화하는 시도다.
--- p.12, 김신식,「아로새긴다는 것」
수많은 사진가들이 복싱과 복서들을 사진으로 찍어왔다. 그것들은 대개 단련된 육체를 지닌 알파 메일에 대한 호기심이나, 혹은 링이라는 일종의 예외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투에 대한 흥분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사진가 니콜라이 호발트(Nicolai Howalt)의「복서(Boxer)」는 사뭇 다르다. 이 연작은 경기를 치르기 전과 경기 후에 각각 찍은 어린 덴마크 복서들의 포트레이트를 모은 것이다. 여기에는 박진감 넘치는 링 위의 격돌이나, 수컷 공작새처럼 꼬리 깃을 세운 알파 메일들의 자신만만한 모습 같은 것은 없다. 즉, 이것들은 무언가가 결여된, 일종의 텅 빈 사진들이다.
--- p.24, 김현호,「링에 오르기 전과 후」
촌스러운 벽지와 낡은 스피커, '안전'은?안중에도 없는 듯 위태롭게 설치된 DJ 부스, 실제로 작동할까 의심스러운 미러볼까지, 믹시스의 사진 작업「Disko」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전형적인 화려한 클럽의 분위기나 '청춘의 열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조잡한 인테리어를 감춰줄 조명과 연기마저도 작가가 터트린 플래시 탓에 모두 사라지고 만다. 허접한 내부 장식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진에는 이와 상관없이 춤과 음악에 빠진 젊은이들의 들뜬 모습이 공허하게 남아 있다.
--- p.70, 이기원,「Alone in the Dark」
비가 오는 11월 아침, 가자지구에는 8일간의 전투 끝에 휴전이 발표되었다. 휴전이 발표되기 불과?한 시간 전까지 공습은 계속됐고, 그 때문에 집이 파괴된 한 청년은 건물의 잔해 속에 서 있다. 그의 이름은 아흐메드, 18살이고 그의 아버지는 어부다. 아흐메드의 꿈은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면서 대학에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살고 있는 가자지구에서 그 꿈은 가까워지지 않는다. 때로 그는 항상 패하는 게임에 휘말린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 p.94, 룰루 다키, 작가 노트 중에서
“물론 이것은 젊음에 대한 진부한 환상이다. 그러나 사진이 환상이 아니었던 적이 있던가? 라이언 맥긴리가 "그 애들은 괜찮아(The Kids are Alright)"라고 말할 때, 언젠가 죽거나 상처받고 말 젊은이들이 마치 폭발적인 젊음의 상징처럼 카메라 앞에서 맨몸을 드러낼 때, 그리고 우리가 햄버거를 사 먹듯 젊음이나 청춘, 그리고 고통과 절망의 이미지를 기꺼이 소비할 때, 환상은 비로소 교환 가능한 상품이 된다. 그것도 아주 인기있는 상품이. 물론 그것이 라이언의?책임은 아니다. 로어 이스트의 맥긴리 소년은 그저 고통스러워하는 친구들을 멋지게 찍어 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그의 따뜻함은 얄궂게도 아름다운 상품이 되어 세계를 떠돈다
--- p.126, 김현호,「아이들은 모두 괜찮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젠 소녀들이 카메라를 손에 넣었으니. 사진책 안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건 페트라만이 아니다. 소녀들은 스마트폰을 들어 거울을 보듯이 외모를 관찰하고, 표정을 바꾸고, 화장을 매만지다 마음에 드는 순간을 선택해 기록한다. 이 사진책 안에는 소녀들이 자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생산하는 일이 처음으로 대중화됐던, 밀레니엄 초반의 풍경이 귀하게 남아있다. 중세 여인들처럼 자신의 모습을 남기기 위해 남성 화가를 고용할 필요도 없고, 카메라를 든 남성 사진가들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이 시점 이후로 소녀들은 마음대로 만들어낸 이미지들을 친구들에게 보내기도 하고, SNS에 전시할 것이다. 마음대로 찍고 멋대로 사용할 것이다.
--- p.135, 김인정,「소녀들은 카메라의 앞과 뒤에서」
엘리노어 카루치는 사진만큼이나 말에 스민 시야가 매력 있는 작가다. 일례로 카루치는 자궁 사진을 선정적으로 집어내어 왜 자궁을 절제하게 되었는가란 독해를 벌이고, 거기서 유발된 스토리텔링엔 머물고 싶지 않음을 밝혔다. 카루치의 강조점은 한 장의 자궁 사진으로부터 중년의 시간을 겪거나 겪을 여성들이 떠올릴 다양한 미래, 작가 본인이 결단한 여성으로서의 어떤 미래다. 물론 이 미래를 두고 작가는 확답보단 도모와 궁리를 권장한다.
--- p.140, 김신식,「이 자리엔 갱년기란 없다」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난 김연인은 대학생 때 민주화 운동을 하다 구속되어 대학에서 제적당했다.?그 이후로 '힘'이라는 이름의 출판사를 설립해 민주화 운동을 계속 펼친다. 1983년 집회 및 시위에 관한?법률 위반 징역 1년 6월, 1989년 국가보안법 위반?징역 1년, 1990년 국가보안법 위반 징역 10월, 1994년 국가보안법 위반 징역 1년. 2003년 민주화 운동 관련자 인정 서류가 집에 도착한다. 2019년 그의 아들은 경찰이 되고, 미묘하게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진다.
--- p.150, 민주, 작가 노트
오 년 전, 현다혜의 할머니는 치매 때문에 요양원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가까운 존재였던 할머니가 멀어지자, 작가는 카메라를 들고 당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다분히 가족을 기록한다는 차원에서 찍었던 그 스냅 사진에는 어딘지 모르게 신경질적이고 날선 느낌이 묻어났다. 당시의 사진을 설명하던 작가가 꺼낸 표현은 ‘미움’이었다. 미움은 바라보며 그저 안타까워할 수 있는 마음보다 훨씬 가깝고 들끓는 감정이다. 언제나 내 옆에 있을 줄 알았는데, 멀리 떨어져 지내야 한다니. 하루하루 기억을 잃어버린다고, 도대체 왜. 그저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그칠 수 없을 정도로 가깝고도 각별한 관계일 때 미움이 비집고 들어온다. ‘누구의’ 할머니가 아니라 ‘나의’ 할머니이기에 안타까움보다 미움이 앞서는 것이다.
--- p.194, 박지수,「꼬리 긴 배웅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