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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 행성 사과밭

외계 행성 사과밭

파란시선-0055이동
고광식 | 파란 | 2020년 05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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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5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200g | 128*208*9mm
ISBN13 9791187756668
ISBN10 1187756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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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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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자 J에게

오늘은 녹아내린 얼굴에 새털구름을 이식하는 날

이식편을 양쪽 뺨에 그물처럼 늘려 놓으면
구름 보조개가 혓바닥을 끊임없이 빨아들일 거야

흙탕물은 피부를 자극하며 어디로든 흘러갈 거야

구름 입자 하나씩 이식하는
손가락마다 묻어나는 물방울들

실내 온도와 조명 각도 때문에
사람들의 욕설도 녹아내릴 거라 생각해

표정은
봉합술로 하얗게 빛나고
가슴은
그늘져 어둡고

막장드라마 화면으로 들어가던 순간
뺨은 모두 녹아내린 거야
각종 구름이 날아다니는 저녁
맨홀처럼 둥글게 열상 입은 붉은 노을을 벗겨 내야지

이제 혓바닥이 수직으로 발달하여
성층권을 넘는다 해도 두렵지 않아

구름은 진피 조직을 자극하며 차오르고
구름 보조개가
거리의 혓바닥을 재배열할 테니까
--- 「구름 이식 수술」 중에서

빈 옷소매가 바람에 펄럭였다
팔월의 좁은 골목길로 흘러드는 별똥별처럼
벌어진 문틈으로 들어오는 눈보라
한쪽 팔이 없는 사내가 털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뜨겁게 달구어진 팬에 반죽을 넣는다

신호등이 사내의 삶 앞에서 항상 붉은색이어도
아이들의 기호가 돌고래자리인지 독수리자리인지를 생각한다
고객이 원하는 상품을 만든다는 것은
마케팅의 제1원칙이라고 발걸음 소리에 귀 기울인다

밤하늘의 검은 여백을 조절한 팬 앞에서
반죽이 금강석이 되도록 달을 구우려 했지만
뚜껑을 여니 이번에도 실패다
검게 타서 반은 숯덩이가 된 분화구
달을 굽다가 실패하면 어떤가

사내는 예열된 팬에 또다시 반죽을 떠 넣으며
과자처럼 바삭하지는 않지만
자꾸 손이 가는 토끼를 품은 달을 굽는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스쳐 지나간 얼굴들
환상통을 앓으며 그들을 굽고 나자
불꽃이 분출하는 분화구가 만들어졌다
갈색의 달이 생크림 모자를 쓰고 있다
--- 「달을 굽는 사내」 중에서

지구가 우주에 피어난 사과꽃처럼 보이는 시간엔
배고픔도 사과 껍질처럼 길어진다
우주 버스는 안드로메다를 떠도는 꽃잎으로 반짝이다가
외계 행성의 분화구에 나를 쏟아 놓는다

사과나무를 심다 보면 UFO가 떼 지어 날아다닌다
그것은 일종의 보너스 같은 거지
이때 나는 외계인들이 던져 준 물고기를 모아 놓는다
무중력 속의 사과밭에서 물고기로 허기를 달랜다

우리 가족은 천체망원경을 들고 수시로 나를 관찰한다
그들의 눈엔 끊어지지 않고 늘어진 사과 껍질이 보일까

내가 새로운 외계 행성 사과밭을 개척할 때면
돌아오라 아들아, 아버지는 메시지를 보낸다
아버지는 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만
끝까지 버티며 반쯤 핀 사과꽃만 전송한다

분화구 사과밭에서 바라보는 지구는 아름다워
기억은 선명한 미장센으로 펼쳐진다
그런데 붉은 사과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리다니
적응 안 되는 환경이 두렵다

변함없이 지구의 자전과 공전은 계속되었고
나는 외계 행성의 DNA를 코로 힘껏 흡입했다
벌거벗은 몸이 떠오르며 우주 전체가 따뜻해졌다
이곳에서 보면 지구는 사과를 떨어뜨리기에 너무 멀다
--- 「외계 행성 사과밭」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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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프로스트가 “숲은 어둡고 깊고 아름답다”고 했을 때 이와 비슷한 격률을 고광식의 첫 시집 『외계 행성 사과밭』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어두운 것은 문해(literacy)의 쉽지 않음에 관해서이고, 깊은 것은 사유의 간단하지 않음에 관해서이고, 아름다운 것은 시학적 감동의 끊이지 않음에 관해서이다; 전체성과 총체성이라는 기호를 통해 고광식의 첫 시집에 접근하는 것이 낫다. 고광식의 시편들에서 전체성과 총체성이 상호 견제적으로 상호 긴밀하게 협력한다. ‘이런 시도 있고 저런 시도 있다’가 그 표상인 헤테로글로시아나 하이브리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 통합과 화학적 융합이 변증법적으로 지양된 고광식 고유의 시적 지형도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주지하다시피 전체성 시학과 총체성 시학은 모순이 기하급수적으로 증대하는 사회에서 그 모순에 대응하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에 관해서이다. 고광식의 시편들에서 전체성(Ganzheit)과 총체성(Totalitat)을 따로 떼어 말할 수 없게 된 것은 (고광식이) 분열?대립?모순?불화를 몽타주, 콜라주, 병렬 양식 등을 통해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전체성), 동시에 분열?대립?모순?불화에 ‘예술가의 손’을 개입시켜 편편 유기적 구조물을 만들어 내었기(총체성) 때문이다; 사회적 존재론이 전체성 시학을 통해 먼저 가고, 예술적 존재론이 총체성 시학을 통해 그 뒤를 따랐다; 고광식은 첫 시집 『외계 행성 사과밭』을 통해 자기만의 지식에 안주해서 시(詩)에 도달하려는 인텔리전스 예술가 지식인이 아닌, 의식의 안과 바깥을 부단히 넘나들며 시에 도달하려는 익스텔리전스(extelligence) 예술가 지식인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 박찬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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