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근하다 퇴근하려면 화장실에서 뭐 안 닦고 나온 것처럼 남은 일들을 흘낏거리게 되었다. 하루 종일 일을 했지만 남은 일거리는 여전히 차고 넘쳤다. 그렇게 찜찜하게 퇴근해서 집에 도착하면 거의 11시 반. 씻고 다음 날 아침거리 준비해놓고 애들 좀 챙기면 새벽 한 시. 뼈 마디 마디가 시리는 몸뚱이를 침대로 밀어 넣으면, 아주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인데 창문이 벌겋게 밝아왔다. 새벽 5시 반부터 부산을 떨어 아침 차려놓고 집을 나서면 6시 반, 7시 20분까지 교무실 입실. 7시 반에 교실 조회 들어가면 그때부터 다람쥐가 쳇바퀴 돌 듯, 시시포스가 바위를 밀어 올리듯 하는 하루가 다시 시작되었다.
---「야자 감독을 하다가 떠오르다」중에서
살아서 다시 학교에 출근을 하고, 아이들을 다시 만나고, 큰 소리로 시험 잘 보라고 말하고, 내신 등급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느냐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오늘처럼 나보다 더 웃자란 어른인 것처럼 구는 한 녀석한테 잔소리 듣는 하루하루가 새삼스러웠다. 그 모든 기억과 깨달음이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예상치 못 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녀석은, 그러니까 녀석은 지난번 내가 당한 사고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정말로 걱정이 되어서 차 창문을 붙들고까지 조심하라고 말을 해준 것이다. 부지불식(不知不識) 중 그걸 깨닫자 주루룩 눈물이 흐른다. 몇 마디 안 되는 말에 모닥불을 지핀 듯 몸이 따뜻해지고 운전대를 꽉 쥐고 있던 손가락 마디마디들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아마도 난 위로가 필요했나보다」중에서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거실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어 어 어~ 하는 소리가 입에서 채 나가기도 전에, 인지할 사이도 없이 줄줄 흘러내린 눈물이 방울방울 굴러떨어졌다. 거실 바닥은 눈물방울 때문에 생긴 얼룩인지 눈가에 고인 눈물 때문인지 더 어룽어룽 거렸다.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낯설고 이해 불가여서 팔뚝에는 오소소 소름마저 돋았다. 이건 뭐지?
그 순간 뇌 회로에 금이 가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결혼 하고 나서 내 손으로 일 년간 차려냈던 생일상. 대충 어림짐작으로만 따져 봐도 지금껏 100번도 더 되는 상차림이었을 거고, 과장 좀 보태면 200번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그런데 정작 내 생일에는 미역국 한 그릇 끓여주는 사람이 없었다. 배가 고픈데, 배가 고파서 미치겠는데, 기운은 없고 일어나는 것조차 버거운데 막상 집에는 밥도 없고 국도 없고 먹을 거라 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이 버스데이」중에서
하지만 남들이라고 특별히 다를까 싶다. 내 주위에는 능력 출중하여 보란 듯이 높은 직위에 올라간 사람도 있고, 훨씬 더 오래전에 떡하니 집 한 채 마련하고도 돈이 모여 한 채 더 사서 자식한테 물려준다는 사람도 봤고, 몇 년 전 장학사 시험에 합격하여 일하고 있는 친구도 여럿 있으며, 책을 열 권도 넘게 출간해서 자기 팬들 많다고 가끔 전화해서 만나자 그런다며 자랑하는 분도 봤지만, 그렇지만 말이다. 나랑 비슷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열심히, 미친 듯이, 허리띠 졸라매고 악착같이 살았으나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그저 먹고살 정도의 생활을 겨우겨우 눈물겹게 유지하고 있는 분들 말이다. 그리고 조금 더 고개 돌려 보면, 열심히 치열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는 게 너무나 팍팍해서 한숨짓는 분들은 어쩌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여전히‘ 삶’이라는 게 무언가를 야심 차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버티고 견디는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버티고 견디게’라도 도와준 내 운(運)과 복(福)에 대해 깊이 감사하게 되는 것이며, 그리하여 ‘삶이란 그저 견디는 일’임을 내가 쓰는 모든 글 구석구석에 깊숙이 벼리어 박아 넣고 있는 것이다.
---「삶은 그저 견디는 것」중에서
다른 가족들이 연락을 받고 올 때까지 홀로 돌아가신 아버지 곁을 지키는 시간. 허리를 굽혀 아버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마도 나와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친밀하고 다정한 신체적 접촉은 사춘기 이후로는 그때가 유일했을 것이다. 여전히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버지 이마에 입술을 대고 최대한 천천히 나직하게 속삭였다.
-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종가의 종손으로, 열 명이 넘는 대가족의 가장으로 한 평생 힘드셨으니 이제는 편안하게 쉬세요.
- 그동안 고마웠어요…… 아빠.
어느덧 8년이 지났다. 이후 아버지 기일이 늘 수능 이후라 내 손으로 직접 제사 음식을 만들 여유가 있다는 사실이, 8년 전 그때의 기억을 아직 놓지 못하고 있는 내게 작은 위안이 되었던가, 아니던가. 해마다 아버지 기일이 돌아오면, 내 몫으로 맡겨진 전을 부치며 인연과 삶과 세월과 그리움에 대해 생각하고는 한다.
---「8년 전 그날」중에서
어떤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일이 몰려서 힘이 들었던 건지, 아니면 누군가와 팽팽한 감정 다툼이 있었던 건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그 순간, 얼룩덜룩 꼬질꼬질한 아들 녀석의 실내화를 본 순간, 왈칵 눈물이, 눈물이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 지금 나는 뭐 하고 있는 걸까. 뭐 한다고 자식새끼 실내화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발견도 못 하고 있었던 걸까.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한다고 남의 집 애들 미친 듯이 돌보면서 정작 내 새끼는 이렇게 거지꼴로 다니게 만든 걸까. 저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아이를 본 유치원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번 터져 나온 울음은 입을 틀어막는다고 멈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세상 억울했다.
-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한들 어차피 세상은 내 편이 아닌데, 아무도 내가 열심히 하는 거 알아주지도 않는데, 그렇게 산다고 돈을 더 버는 것도 아니고, 승진하거나 출세하는 것도 아니고, 명성을 쌓는 것도 아닌데. 어차피 영악하게 지 거 아득바득 챙기는 인간들이 칭찬까지 싹쓸이로 다 가져갈 텐데, 난 무슨 대단한 영광을 보겠다고 내 새끼 실내화가 이 지경 될 때까지 몰랐던 걸까.
한번 둑을 무너뜨리고 제방을 망가뜨린 생각은 끝을 모르 고 일상의 평온을 휩쓸었고, 그날 나는 현관문 앞에 주저앉아 한참을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맑은 토요일, 한가로운 오후의 햇살이 빌라 주차장 한 귀퉁이에 위치한, 늘상 어두컴컴했던 서민 빌라를 자애롭게 비추어주던 어느 토요일이었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1」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