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정서적 발달을 위한 자양분을 충분히 받지도 못한 채, 생존을 위해 자기 입증과 부정을 체화하며 자라난 청년 세대가 사회 문제의 해결 주체로 선다고? 사회 문제의 해결 주체로 서는 청년이라는 말은 참으로 아름답지만, 짧은 시간 내에 사회 문제의 해결 주체로 보이기 위해 또 자기 성취와 증명의 스토리를 만들고 발신해야 하는 청년들에게 그 아름다운 말은 무거운 짐이자 압박이다. 그리고 청년들은 왜 자신이 참 좋고 의미 있는 일을 하는데 소리 없이 찾아오는 번아웃과 우울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부족한 자신에게서 또다시 문제점을 찾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또다시 보람찬 자기 성취와 증명의 길을 걷고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사회에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온전할 수 없는 패턴이다. 사회에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자기 존재의 가치를 찾지 못하는 양상이 반복된다. 일차적으로 자기 존재가 그 자체로, 이유와 조건 없이 받아들여지고 돌봄을 받는 양육의 경험이 부재했기 때문이고, 또 거기서 오는 내면의 상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데 도움을 주는 관계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이미지, 대상으로서 청년을 마주하는 게 아니라 존재, 몸으로서 청년을 마주하면서 배우고 성찰한 지점이다.
---「사람을 살리는 일」중에서
농업 판을 벗어나지 않았던 건 이곳에 계속 있다 보니 애정이 깊어진 것도 있지만, 익숙하고 편했던 이유도 크다. 사실 낯선 일을 새로 시작하는 것도 두려웠다. 어떡할까. 우선 거리를 두고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한동안은 거리를 두고 새로운 공부와 일을 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 모든 시간이 내게는 여행과 같았다. 퇴사 후 그 시간은 개인의 욕망을 하찮게 여긴 채 공적인 사고를 강조한 나의 지난 시간을 후회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새로운 곳을 여행하며 낯선 농민들을 만났고, 새로운 일을 하며 새 동료들을 만났다. 취미로 시작한 몇몇 일은 더 깊게 몰입할 수 있는 일들로 변해 갔다. 보지 자수 워크숍 ‘수놓아보지’가, 누드 드로잉 작업과 워크숍 ‘몸의 기억’이, 농촌 페미니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 ‘반사’가, 농촌 페미니즘 캠프 ‘농촌청년여성캠프’가, 청년 농민 정책 토론회가, 농촌 페미니스트 작가들의 공동 작업 ‘농촌게릴라걸즈’가 그랬다.
---「어느덧 나는 다시 농민이 되고 싶어졌다」중에서
‘더러운 정치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며 선거 연령 하향을 반대하는 이들을 향해, “정치는 ‘우리’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일이며, 정치에 참여할 권리는 이 사회에서 노예나 투명인간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갈 권리”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해 왔습니다. ‘청소년은 미성숙하므로 참정권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이들에게는, “누구나 정치를 할 수 있어야 진정한 민주주의이며, 누군가 정치로부터 배제된다면 그건 가짜 민주주의”라고 외쳤습니다. 정치에 참여하는 데 자격 조건이란 없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간 정치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졌던 이들이 정치에 참여할수록 우리 사회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이 제가 가진 신념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정치를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청소년참정권운동에 몸담았던 제가, 결국 스스로 정당 정치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별다른 스펙도, 가진 기술도 없어 나이는 먹는데 취업은 할 수 있을까 돈은 어떻게 벌어야 하나 전전긍긍하던 제가 정치의 일원이 된 건 스스로도 조금은 신기하지만, ‘누구나 정치’하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르면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 달라’ 요구하던 위치에서, 우리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힘을 모으자고 제안하는 위치로의 이동이 저로서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되는 계기였습니다.
---「당신은 나를 싫어할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에게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입니다」중에서
어떤 문제의 당사자이자, 가장 가까이에 있던 목격자. 그리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질문을 던지는 가장 절실한 학습자. 나는 처음으로 모자이크 된 뒷모습들을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다. 당사자들이 단순히 슬프고 힘들고 비이성적인 사람들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디어가 담는 당사자의 모습이 무력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이 사람들을 대중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함부로 편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들을 ‘마주하는’ 느낌을 전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자격시험도 통과하지 못했더라도, 그런 일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걸 강하게 원한다는 이유로. 그래서 그걸 같이할 만한 사람들을 모았다.
---「사람을 움직이는 메시지의 힘」중에서
인권운동, 디자인, 교육 등 다른 관심사와 환경을 가지고 하자에서 만난 우리가 공통으로 울림을 느낀 것은 기술이었다. 기술을 통한 배움은 그럴듯한 말과 시스템이 전달해 주지 못한 새로운 관계성과 실체감 있는 전환의 감각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세 명 모두 각기 다른 삶의 서사 속에서 치열하게 찾고자 했던 ‘자립’의 실마리를 기술을 통해 발견했고, 이것을 어떻게 앞으로도 지속 가능하게 이어 나갈지 같은 고민이 있었다.
하자를 마치곤 각자 다른 일을 하게 되었지만 작은 프로젝트로라도 우리가 배운 기술의 즐거움을 다른 여성들과 누리고, 재미난 작당을 이어 나가고 싶었다. 서로가 서로의 비빌 언덕이 되어, 또 누군가의 안전망이 되어. ‘지금 여기(here)’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여성과 기술’을 다루자며 ‘여-기(her-e)’라는 팀을 만들었고, 소규모 커뮤니티 지원 사업을 받아 여성을 대상으로 용접과 난로 제작 수업을 열었다. 가장 첫 번째로 용접을 선택한 건 우리가 기술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가장 잘 드러내는 도구이기도 했고, 쉽게 접하기 어렵고 특별하기도 한 용접의 경험을 다른 여성들에게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무모하고 아름답게 나선을 나아갑니다」중에서
소고는 비진학 청년들의 자립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지만, 낮은 임금은 역설적으로 빈곤 청년들의 유입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저 역시 상대적으로 조금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소고에서 계속 일할 수 있었을 거예요. 후배들이 점점 생기면서 저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한편으로 저 스스로도 많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소고에서 늘 제게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었죠. 청년 이사, 창업 멤버 혹은 선배……. 그런 수식어를 들을 때, 혹은 누군가에게 그렇게 소개될 때, 저는 부끄러웠어요. 내가 그 수식어에 적합하게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닌 것 같았거든요. 그냥 포장된 느낌이 너무 컸어요. 저는 한참 부족하다고 생각했죠. 후배들을 대할 때나 가르칠 때 많이 생각했어요. ‘씩씩이와 차차가 나를 이끌 때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많이 힘들었겠다. 많이도 참았겠다.’ 그래서 후배들을 볼 때 괜히 부끄럽고, 내가 이들에게 씩씩이나 차차처럼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점점 더 노력했던 것 같아요. 부끄럽지 않으려고요. 그리고 제가 많이 부족해서 씩씩이와 차차를 고생시켰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열심히 노력해서 씩씩이와 차차를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해 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점점 요리도 직접 할 수 있게 되고, 단가 계산도 배우고, 장도 보러 다니고…… 제 위치에서는 나름 열심히 일했던 것 같아요. 물론 씩씩이가 생각하는 기준에는 못 미쳤을 수도 있지만요.
---「저도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졌습니다」중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악기 하나쯤 다룰 수 있다면 삶이 더 아름답고 풍성하다고들 얘기합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기술 하나쯤 다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악기 하나를 연습하기 시작하면 다른 악기들과의 앙상블이 보이고 음악 자체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처럼 모두가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 삶의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는 방식이 아닌,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 중 하나쯤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삶의 기술을 가졌으면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가진 것으로 누군가를 돕고, 누군가 갖고 있는 기술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말이지요.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일까요?
먹고살기만 해도 너무 바쁜 세상이라는 것을 알지만, 일상 속 모든 것들을 외주를 맡기듯 살아가진 않으면 좋겠습니다. 저에게는 여러 삶의 기술 중 하나가 미장이듯, 여러분들에게는 또 다른 지혜로운 기술들이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미장 한번 해 보러 저를 만나러 오시길 바랍니다. 그럼 저도 여러분들의 좋은 삶과 좋은 일들을 배우고, 만나러 가겠습니다.
---「노래하는 미장이」중에서
성평등플랫폼에서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을 만났고, 함께하는 방법을 배웠으므로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 보고 싶다. 요즘 점심시간마다 간단한 도시락을 싸 오거나 조리해서 볕 좋은 옥상에서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 기운이 있고 기분이 좋으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눈다. 전주에 낡고 저렴한 집을 사서 우리의 놀이터로 만들자고, 직접 집을 고치고, 예쁘게 꾸미고, 다른 페미니스트들을 초대해서 놀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자고. 아직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툭툭 꺼내 놓는 수준의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능력이 많고 멋지지 않은가.
혼자서도 집을 잘 고치는 여성, 목수인 여성, 페미니스트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크리에이터 여성과 함께라면 뭔가 재미있는 것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나는 그 안에서 맛있는 음식과 술을 파는 식당을 해 보고 싶고, 타로 상담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전주에 여성주의 댄스 모임을 만들고, 농부가 되고 싶다는 꿈도 가지고 있다.
---「나를 지키면서 남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중에서
이 작업을 위해 동료들과 베트남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스물셋이었다. 20대가 되면서 나는 10대와는 다른 삶의 감각을 알아 갔다. 작업 혹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삶의 기반을 만드는 일의 비중이 더 커졌다. 일과 삶의 균형, 일종의 작업 환경 운동 차원에서 다큐멘터리 작업공동체를 꿈꾸게 되었다. 작업자들이 열심히 작업하고 그렇지 않을 때엔 모여 함께 농사도 짓고 요가를 하는 모임, 작업과 일상을 조화롭게 만들어 나가는 연대를 만들어 다큐멘터리 작업자들의 자립을 일부나마 실천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도구로서 다큐멘터리를 함께 고민하고 다큐멘터리 운동도 하고 싶었다.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지금 나의 여성 동료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이었고 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여성 작업자 연대로서 「기억의 전쟁」 제작 팀은 때때로 ‘언덕’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불렀다. 동료이자 작업자인 서로가 서로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 주자는 의미였다. 생애 주기에 따른 결정과 선택을 응원하고 존중했으며, 작업 초기 예산이 넉넉하지 않았을 때도 활동비를 책정해서 작업과 생활이 안정될 수 있도록 했다. 베트남과 서울을 오가는 촬영에서 특히 우리 작업은 음력 설 즈음 제사를 챙기는 일에 집중했기 때문에 촬영이 없는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아르바이트로 생업을 이어 갈 수 있도록 서로를 배려했다. 서로의 형편을 고려해 좋은 일거리를 소개해 주고, 만날 때 항상 끼니를 함께했다.
---「사랑과 우정의 약한 연대기」중에서
볍씨 구성원들은 ‘생명이 소중한 세상, 생명이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고, 볍씨 아이들은 일도 잘하고, 살림 기술도 있고, 공동체 안에서 갈등을 풀어 나가는 방법을 어릴 때부터 경험하며, 주도적으로 자기 삶을 꾸려 나가는 것을 일상을 통해 훈련한다.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살리고, 주변을 살리고, 지구를 살리는 사람으로 커 가기를 우리는 기대한다. 그런데 아무리 아이들을 그렇게 키운다고 해도 세상이 망해 가는데, 우리의 존재 기반인 지구가 지속 가능하지 않은데 그 위에서 아이들이 어떤 꿈을 꿀 수 있을까,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교사로서 너무 부끄러웠다.
더 이상은 두렵다는 이유로, 잘 모른다는 핑계로 뒤로 빠져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애써 보자”고 얘기하듯이, 나 또한 두려움을 넘어 나아가야 했다. 아직 살아갈 날이 훨씬 많이 남은 오늘의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게, 오늘의 어른인 나부터 행동해야 했다. 볍씨 교사를 넘어 우리들의 존재 터전인 지구에서 살아가는 다른 생명들을 위해 발언하고 행동해야 했다.
---「나살림, 서로살림, 지구살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