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약 없는 오랜 기다림이 별로 외롭진 않았다. 외로움이나 서러움 같은 건 누군가가 나를 챙기는 게 당연할 때나 느끼는 거니까.
나는 학교나 회사에서, 심지어 집에서조차 단 한 번도 관계의 중심이었던 적이 없다.
그런 나를 유일하게 챙기는 사람은 우제현뿐인데, 요즘 그와 사이가 나쁜 탓에 딱히 날 챙겨 주는 사람이 없었다.
초겨울 밤거리는 여느 때보다 추웠다. 날 선 바람이 뺨을 사납게 할퀴었다.
어느덧 시계는 자정을 가리켰다.
지루함에 발끝만 까딱이던 내가 아쉬운 걸음을 뗀 바로 그 순간.
“서송하!”
불쑥 나타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를 크게 불렀다.
얼떨결에 뒤돌아보니 우제현이 화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선배?”
그는 놀라서 멈칫한 내 앞으로 다가와, 다짜고짜 소리쳤다.
“너 미쳤냐?”
“…….”
“아직도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해? 아무도 안 오면 눈치껏 집에 갔어야지!”
우제현이 신경질적으로 숨을 골랐다.
허공에 부옇게 흐려지는 입김은 추위를 증명하듯 유난히 선명했다.
“휴대폰은 또 왜 꺼 놨어.”
“배터리가 다 돼서요.”
“보조 배터리는.”
“그것도…….”
“가지가지 한다.”
“…….”
“멍청하든가, 미련하든가 하나만 하라고! 하나만! 왜 이렇게 너 자신을 못 챙겨? 하는 짓마다 대체 왜 그 모양이야?”
나는 별안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가 데리러 와서 감동했냐고? 그럴 리가.
짜증 나서 울었다, 짜증 나서.
내가 말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며 우제현을 올려다보자,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야…… 네가 뭐 초등학생이라도 돼? 다 큰 어른이 그깟 말 좀 들었다고 울어?”
“선배가…… 선배가 짜증 나게 굴잖아요, 지금!”
“뭐?”
“안 그래도 춥고 배고픈데 하필 선배까지 나타나서 짜증 나 죽겠어요! 아니, 누가 데리러 오랬어요? 자기가 알아서 와 놓고는 나한테 멍청하다느니, 미련하다느니 선배가 뭔데 화를 내요? 선배가 대체 뭔데요! 추워도 내가 춥고, 배고파도 내가 고파요!”
내 착각인가.
분명 무표정을 유지하는 우제현이 어딘지 모르게 충격받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난 애초에 선배가 오길 바란 적 없어! 이렇게 와 봤자 하나도 안 반갑다구요, 알았어요? 엉엉……. 선배만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선배가 왔냐구요. 허엉…….”
나는 젖은 눈가를 마구 문지르며 씩씩거렸다. 축축한 얼굴이 터질 듯이 뜨거웠다.
“난 왜 이렇게 되는 게 없는 거야…….”
펑펑 울며 한바탕 쏟아 내고 나자, 이상하게도 속이 시원하다기보다 더욱 초라해지기만 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우제현은 잡아먹을 듯이 화를 낼 땐 언제고, 사뭇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밥부터 먹자.”
“싫어요.”
“왜.”
“선배랑 먹을 바에야 굶을래요.”
“한우 꽃등심이어도?”
“네. 됐어요.”
“살치살은.”
“됐다니까요?”
“그럼 안창살.”
“…….”
내 다짐은 10초도 안 돼서 흔들렸다.
안창살은 내가 좋아하는 부위 중 하나다. 진짜 먹을 수 있을까 싶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뒤로 우제현이 아무 말도 없기에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제비추리는요.”
“딱 거기까지. 하여튼 입만 고급이지, 쥐뿔도 없는 게.”
“아, 또 짜증 나게 갈구고…….”
“따라와.”
그는 찬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며, 먼저 걸음을 뗐다.
(중략)
아무리 생각해도 친한 선배를 경찰서에 취객이라며 버릴 수는 없었다. 심지어 오늘은 한우까지 날름 얻어먹었으니 더더욱 그래서는 안 되는 거다.
……그래. 우리 집이다.
“제가 데리고 내릴게요.”
나는 택시 요금을 낸 뒤 그를 등에 둘러업었다.
축 늘어진 남자의 몸은 납덩이처럼 무거웠지만, 그럭저럭 감당할 수…….
쿵!
“악!”
그의 무게에 몸이 짓눌려 결국 아스팔트에 무릎을 찧었다. 다행히 겨울이라 옷이 두꺼워 다치지는 않았다.
“후욱…… 할 수 있어.”
나는 굳게 다짐하며 다시 일어났다.
후들대는 다리로 겨우 몇 걸음 걷다가 무릎 꿇고, 간신히 일어나서 발을 내딛다가 철퍼덕 넘어졌다.
그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한 나는 성질이 확 돋아, 평온히 잠든 우제현에게 소리를 내질렀다.
“야! 술 꼴랑 그거 먹고 못 일어나냐! 이럴 거면 아침마다 헛개즙은 왜 먹는데!”
그가 원샷으로 때려 붓던 헛개즙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진짜.
“아악 씨! 더럽게 무거워! 아아악!”
“…….”
“일어나! 일어나라고, 제발!”
그의 멱살을 미친 듯이 잡아 흔들었지만 소용없었다.
역시 나는 쓸데없이 선량한 소시민이 맞다.
상대가 아무리 인사불성이어도 차마 정신 차리라며 뺨을 때리지는 못했다.
“아, 진짜…….”
마음속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 가라앉히고 우제현을 재차 업었다.
내 몸 위로 포개진 그는 숨결도, 체온도 무척 뜨거웠다.
덕분에 나는 찬 바람이 부는 와중에도 땀을 비 오듯 줄줄 흘렸다.
“허억, 헉……. 꽃등심이니까, 내가…… 봐준다……! 안창살도, 안 사 줬으면, 택도…… 없었어! 한우가, 너를, 살렸다! 우제혀어언!”
“흐응…….”
“흐응……? 흐으으응? 난 죽겠는데, 지는 편하다, 이거지! 아오! 그냥, 여기에 확, 버릴까 보다!”
그를 아등바등 업고 가는 내내 무거운 타이어를 메고 뛰던 육상 선수 시절이 떠올랐다.
사실 술자리에서 그에게 내 성장담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았다.
뒤늦게 솔직해지자면, 나는 단지 열심히 해도 안 돼서 운동을 그만둔 게 아니라 어떤 비참함 때문에 관뒀다.
그 시절 트랙에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만년 1등이 있었다.
객관적으로 나보다 연습 시간도 적고, 타이어 따윈 어깨에 멘 적도 없는데 압도적인 기량을 뽐내던 아이. 언론도 열광하는 타고난 육상 천재.
그 아이의 등을 보며 달릴 때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뒷모습을 따라갈 때마다 힘들어서 헛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박탈감이 아니라 오기가 들었다. 한 번쯤은 그 아이를 이기고 우승 메달을 목에 걸고 싶은 오기.
나는 피나는 노력 끝에, 마지막 경기에서 초반 선두를 놓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통쾌하기는커녕 오히려 숨통이 조였다.
트랙을 달리면서 언뜻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는 등 뒤의 발소리에 쫓기는 기분이었다.
결국 집중력이 흐트러져 발이 꼬였다.
그대로 트랙에서 나뒹군 나는 번호표 끈이 떨어진 채, 저 멀리 뛰어가는 다른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만년 1등인 그 애는 어김없이 결승선에 가장 먼저 들어갔다.
그 모습을 망연히 보는데…….
짜증 나게도 마음이 편했다.
천재에게 굴복하는 안도감, 나는 원래 운이 잘 따라 주지 않는 아이라는 패배 의식이 나를 트랙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열심히 해도 안 돼서 그만두었다고, 딱 그 부분까지만 말했다.
아까 우제현이 말버릇처럼 그 무엇도 끝나지 않았다고, 그냥 끝의 끝까지 버티라고 했을 때 어쩌면…… 내가 육상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언젠가 판을 뒤집을 기회가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혼자 지레 겁먹고 도망친 건 아닐까.
처음으로 육상을 관둔 걸 잠시나마 후회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