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글꼴의 탄생,
그리고
혁신적 변화
1. 용어의 정립
한자 서예 용어 중 영자팔법(永字八法)이란 것이 있다. 영(永)자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점과 일곱 가지 획의 특징에 맞춰 각각의 명칭을 정해 놓은 것으로, 서예계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변함없이 이 명칭을 사용해 왔다.
점획의 명칭이 존재한다는 것은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어떠한 특정 획을 설명해야 할 때 해당 부분의 명칭을 불러 설명하면 듣는 이에게 보다 빠르게 전달하고 쉽게 이해시킬 수 있다. 글로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다. 단순하고 직관적이며 편리하다. 이렇듯 점획을 지칭하는 명칭의 존재는 교육이나 학술 등 여러 방면에 있어 다양한 이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글 서예의 경우 지금까지 점과 획의 각 부분을 지칭하는 고유(固有) 명칭이 없다. 일제 강점기 이후 현재까지 많은 시간이 흐르고 한글 서예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이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나 노력한 흔적 또한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타이포그라피의 경우 근래 들어 구성원 모두의 합심으로 한글의 세부 명칭을 정한 후 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글씨를 쓰는 입장에서 보면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지만 그 용어를 한글 쓰기, 특히 궁체에 그대로 적용시키기에는 몇몇 명칭을 제외하고는 사용에 무리가 따르며 부적합한 경우가 많이 있다.
한편 한글 서예계 일각에서 한자 서예의 명칭과 용어를 그대로 쓰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으나 한글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형태의 획과는 서로 맞지 않아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 아울러 한글의 독자성을 포기하고 한자 서예에 종속되는 듯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도 무시할 수 없다.
이에 한글 쓰기의 표준 서체라 할 수 있는 궁체를 바탕으로 점과 획의 각 부 명칭을 새로이 정립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글 쓰기와 연구에 일말의 보탬이라도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 명칭의 정립 기준이 되는 서체는 현대 궁체이며, 점과 획의 형태와 위치에 따라 명칭을 정하였다. 또한 타이포그라피에서 정한 한글 각 부의 명칭 중에서 수용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대로 수용했음을 밝힌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글 명칭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한글 명칭을 정하는데 굳이 한자나 영어를 일부러 쓸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2. 한글 창제 초기 글꼴의 변모 양상
가.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解例本) 글꼴
1443년 한글 창제이후 가장 처음 선보인 한글 글꼴은 1446년에 제작된 『훈민정음 해례본』(이하 해례본)에 나온 글꼴이다. 이는 누구나 다 주지하고 있는 사실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다만 해례본의 글꼴은 서체라기보다는 각각의 직선과 사선, 원 등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모양을 모아쓰는 방식으로 도안(레터링)된 자체(字體)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해례본의 글꼴은 기본적으로 정방형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가로와 세로획은 일정한 굵기의 형태로 수평과 수직을 이루고 있다. 점은 둥그런 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점과 ‘ㅇ’ 외에 곡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중성 ‘ㅡ’와 ‘ㅣ’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초성의 크기보다 길게 처리되어 있다. 그리고 초, 중, 종성의 획들이 기본적으로 서로 접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는 특이점을 볼 수 있다. 인쇄본이라는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획과 획, 점과 획 사이에 공간을 두려 노력하고 있으며 불가피하게 접할 경우 최소한으로 접하도록 하고 있다. 결국 이와 같은 치밀한 계산에 따른 점획의 공간처리와 배분은 각각의 획들이 서로 간섭받지 않고 각자 도드라지게 보이는 효과가 나타나도록 계획적으로 설계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각각의 자소가 모여 하나의 글자를 완성할 때는 초, 중, 종성이 위치한 곳에서 각자 가질 수 있는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으며, 중성 ‘ㅣ’가 보이지 않는 가상의 정방형 오른쪽 마지막 선에 정렬한다면 중성 ‘ㅏ’와 ‘ㅑ’가 올 경우 ‘ㅣ’선보다 약간 안쪽(왼쪽)으로 들어가 위치한다. 이러한 구성법에 따라 정방형을 기본으로 하는 글꼴이 형성되며 글자의 무게중심이 자연스럽게 중앙에 위치한다. 이는 처음부터 철저한 계획과 설계에 따라 만들어진 글꼴이라고 할 수 있다.
나. 글꼴의 1차 변화
『훈민정음 해례본』이 만들어진 이듬해인 1447년에 글꼴의 1차 변화가 일어난다. 불과 1년 만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에서 중성 ‘ㅓ, ㅏ, ㅑ, ㅗ, ㅜ, ㅠ’의 원점들이 네모나고 각진 형태로 바뀌게 된 것이다. 즉 동그랗게 그리는 원형의 점에서 긋는 획으로의 형태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이 변화에 대해 정우영은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중성의 자형을 원점(·)에서 짧은 획으로 변경한 주된 이유로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①서사적인 측면에서 중성의 초출자 및 재출자, 그리고 2자, 3자 중성 상합자에서 天(·)에 해당하는 원점(·)을 서사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 ②비록 어렵게 원형을 유지했다고 하더라도 해례본에서 제시한 ‘ㅐ,ㅒ,ㅙ’자의 경우처럼 ‘ㅏ,ㅑ,ㅘ’와 그 뒤에 오는 ‘ㅣ’의 중간에 ‘원점(·)’의 크기의 2배 이상 공간을 확보하여 안배하여야 하나, 음절합자를 할 경우에는 그것이 어렵고, 시각적으로도 변별력이 크지 않다는 점 등이 ‘·’를 획으로 변경한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 주장은 서사의 측면에서 보면 상당한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붓으로 정확한 원을 그리기에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원(正圓)을 그리는데 들어가는 시간은 서사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 획을 그을 때의 두 배 이상의 시간과 집중력이 소요된다. 따라서 그리는 점에서 긋는 획으로 변화를 준 것은 이런 불필요한 점을 해결한 것이며, 아울러 본래의 음가를 그대로 인식시킬 수 있는 성공적인 방법을 찾아낸 셈이라 할 수 있다. 즉 서사의 입장에서 보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에서 점을 획으로 처리한 것은 한글 글꼴의 실용화에 따른 불편함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해결책을 마련한 것이다.
이렇게 한글 글꼴의 1차 변화가 일어난 이후 1448년에 간행되어 나온 『동국정운(東國正韻)』은 앞선 간행본들과 달리 해례본의 자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동국정운』 자체가 한글의 표기 음을 규정하고자 만든 운서(韻書)라는 점에서 해례본과 같은 자형과 표기 원칙을 지키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 할 수 있다.
다. 글꼴의 2차 변화
-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 - 한글 글꼴의 혁신
글꼴의 1차 변화 이후 불과 8년 만에 한글 글꼴의 혁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중차대한 변화가 다시 일어난다.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에 나타나는 글꼴이 바로 그 변화의 주인공이다.
1455년에 목활자로 간행된 『홍무정운역훈』의 글꼴은 그 이전의 굵기 변화 없이 직선과 사선으로 도안 된 형태의 글꼴에서 탈피하여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진 붓으로 쓴 서체의 모양을 갖춘 글꼴로 일대 혁신을 이루었다.
방점의 형태는 원형의 점에서 붓으로 눌러 만들어내는 삼각형 모양의 점으로 변화했으며, 가로획 ‘ㅡ’모음에서는 ‘들머리’와 ‘맺음’이, 세로획 ‘ㅣ’모음에서는 ‘돋을머리’와 ‘왼뽑음’이 나타난다. 그리고 모음 ‘ㅠ’의 두 번째 획에서 45도 각도를 이루며 좌하향 방향으로 곡선을 그리며 내려오는 ‘삐침’을 보여준다. 이는 오늘날의 궁체에서 볼 수 있는 형태와 같다.
한편 『홍무정운역훈』에서는 자음 ‘ㅈ, ㅉ’의 첫 번째, 두 번째 획을 나누어 쓰지 않고 한 번에 연결해서 쓰는 형태도 볼 수도 있다. 이렇게 획을 한 번에 연결해서 쓰는 방식은 글자를 흘려 쓸 때 사용하는 쓰기 방법으로, 당시에 이미 한글 흘림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한글을 사용하던 계층에서 당시 필기도구였던 붓을 사용한 쓰기법이 어느 정도 실용화 되어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홍무정운역훈』 글꼴의 변화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를 꼽는다면 역시 ‘ㅣ’ 모음의 변화를 꼽을 수 있다. ‘ㅣ’모음은 앞서 살펴봤듯이 그 형태가 오늘날의 궁체와 같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변화를 보인다. 뿐만 아니라 ‘ㅣ’ 모음의 길이 또한 이전과 달리 길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ㅣ’ 모음의 길이 변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글자의 무게중심을 이동시킬 수 있을 정도로 글꼴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또 ‘ㅣ’ 모음이 길어진다는 것은 글자의 구조와 무게중심의 이동 뿐 아니라 한글 글꼴과 서체의 변천에 있어서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궁체가 ‘ㅣ’ 모음의 길이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글자의 무게중심이 오른쪽으로 이동하고 그렇게 이동한 무게중심에 따라 ‘ㅣ’축을 중심으로 일렬로 줄을 맞추는 특징으로 발전하게 되었음을 볼 때, 『홍무정운역훈』에서 나타나는 ‘ㅣ’모음의 길이 변화는 앞으로의 한글 변모 양상의 방향을 알려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홍무정운역훈』의 글꼴과 점획에서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지만 종성 ‘ㄱ,ㄴ,ㄷ,ㅁ,ㅂ’이 각각 그들에게 주어진 방형의 공간을 모두 사용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봐서는 정방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음운체계에 따른 공간배분이 아직 조형체계로의 공간배분으로 완전히 이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하더라도 『홍무정운역훈』에서 보이는 초성의 크기가 이전과 달리 작아진 모습을 보이는 것과 음운체계의 공간배분이 대부분 종성에만 해당하고 있음을 볼 때, 글꼴의 혁신적인 변화라는 커다란 흐름에는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이전시대의 글꼴에서 볼 수 없었던 점획의 여러 혁신적인 변화와 형태들을 봤을 때 궁체의 단초를 『홍무정운역훈』의 글꼴에서 찾을 수 있으며, 또한 궁체로의 변화를 꾀하고자하는 변모 양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홍무정운역훈』의 글꼴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하겠다. 이는 글꼴 변천에 있어 『홍무정운역훈』의 글꼴이 가지는 역할과 의의를 다시금 되새겨 보게 한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