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열 살밖에 안 된 어린 딸이 황태자의 냉대를 받다가 제 얼굴을 망가뜨렸다. 아버지를 꼭 닮은 얼굴을 황태자가 끔찍해한다는 이유로. 그녀는 그리되어서도 황태자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울부짖는 어린 딸을 끌어안고, 아비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반드시 널, 황태자비로 만들어 주마. 이 아비가 그리 만들어 줄 것이다.”
마카레나 백작은 제 딸에게 맹세했다. 그다음의 맹세는 오직 마음속에 새겼다.
‘만약 황태자가 끝까지 널 거부한다면, 나는 널 비참하게 만든 황태자에게, 그리고 황제와 황실에 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반드시.’
그날 이후로 한시도 그 맹세를 잊은 적이 없었다.
마카레나 백작은 카루나를 클레이엔의 대역으로 삼은 후, 이웃 왕국과 은밀히 내통하며 두 번째 맹세에 대한 준비를 시작했다. 지난 10년간 황궁에 자주 드나들지 않고, 중요한 일을 카루나와 루시온에게 맡긴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무리 유능하다 하나 그는 역시 인간이었다. 감당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었다.
“이웃 왕국이 내 말을 믿고 전쟁을 선포한다면, 바이켈드 공작은 변경으로 떠날 수밖에. 전쟁에 신경이 쏠리니 당연히 틈이 생길 터. 그 틈을 이용해 황태자를 암살하고, 황성을 장악한다.”
이게 마카레나 백작이 이웃 왕국에 보낸 밀서의 내용이었다.
이웃 왕국은 마카레나 백작이 전면에 나서서 반역을 일으킬 것으로 생각하고 있겠지만, 마카레나 백작은 직접 움직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를 대신하여 움직일 수족들이 황궁 안팎에서 준비를 마친 후 그의 명령만 기다리는데 왜 그러겠는가. 어둠 속의 사내는 그들 중 한 명이며, 그들과 마카레나 백작을 잇는 전령이기도 했다.
“그쪽에서는 백작님께서 황제의 칙서를 위조하여 바이켈드 공작을 다시 수도에 불러들이고, 농성하며 시간을 벌어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이곳으로 군대를 끌고 올 때까지 말입니다.”
어둠 속 사내가 이웃 왕국의 요구 사항을 말했다. 마카레나 백작은 픽,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이웃 왕국의 속셈은 안 봐도 뻔했다. 바이켈드 공작, 라크안을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으니 마카레나 백작에게 떠넘기려는 것이다.
라크안은 변경에서 꽤 악명을 쌓은 듯했다. 이웃 왕국은 라크안만 없으면 제국 따윈 문제 될 것 없다는 오만을 드러냈다. 라크안이 너무도 강력하기에 주위의 다른 것들이 하찮아 보이는 효과였다.
이웃 왕국은 마카레나 백작이 이길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둘이 싸우다 자멸하면 더없이 좋으나, 그 역시 거의 불가능하리라 생각할 게 분명했다. 마카레나 백작이 최대한 라크안의 진을 빼 놓으면, 약해진 라크안을 상대하거나, 아니면 수도에 꼭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제국의 영토를 어느 정도 점령한 뒤 평화 조약을 맺으려는 생각 정도나 하고 있을 터였다.
마카레나 백작은 이웃 왕국의 얕은 수작에 넘어가 줄 마음이 없었다. 애초부터 그의 목적은 제국의 멸망이나 이웃 왕국의 승리가 아니었다. 클레이엔에게 상처를 입히고, 끝까지 클레이엔을 거부한 황태자에 대한 복수였다. 또한, 그 복수 이후에도 마카레나 백작가는 제국 최고의 권세가로 건재해야 하며, 클레이엔은 제국의 꽃이 되어야 했다.
황태자 암살에 성공하고, 수족들이 황제를 인질로 삼고 라크안을 새로운 황태자로 세우고자 움직이기 시작하면. 마카레나 백작은 또 다른 수족들과 함께 그 반역의 무리를 덮쳐 황제를 구출할 예정이었다.
반역 무리가 라크안의 명령을 받아 움직였다는 증거는 이미 준비해 두었다. 그리되면 마카레나 백작과 클레이엔은, 제국을 집어삼키려는 음모를 꾸몄던 라크안으로부터 황제를 구출하고 제국을 지켜 낸 공신이 된다. 지금까지의 죄명도 모두 라크안이 씌운 누명이라 주장하면 된다.
‘빈 황태자 자리에는 방계 황족 중 한 명을 세우면 되겠지. 내 딸의 말을 잘 듣고 순종할 만한 자로.’
마카레나 백작은 벌써 다음번 황태자를 고르고 있었다. 반드시 처리해야 할 사람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루나, 그 계집은 반드시 사지를 찢어 죽이리라.’
마카레나 백작이 눈을 번뜩였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