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시스와 저에 대한 이야기를 술술 털어 놓았다. 묘하게 순종적인 모습이었다. 카루나는 저도 모르게, 올가가 말하는 내내 그녀의 머리와 어깨를 토닥여 주고 있었다.
‘나도 퍽퍽하게 살아온 거로 따지자면 어딜 가도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쪽도 꽤나 고달프게 살았네.’
어릴 적 이야기를 들으며 괜히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시스가 물의 장막으로 떠난 후 10년간, 단 한 번도 배불리 먹어 본 적 없다는 말이 특히나 심금을 울렸다. 그리고 리센의 이야기가 나올 때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세나 역시 의외라는 듯 빵을 씹다 말고 멍한 표정으로 올가를 바라보았다.
“아는 사이십…… 아, 설마. 전 숲의 후계자가 남쪽에 머물렀다는 게 그럼…….”
올가는 두 사람분의 동요를 금방 눈치챘다. 하지만 그 동요를 이용할 순 없었다. 세나도 카루나도 리센의 죽음이나 올가의 불행에 감정이 흔들릴 정도로 마음 여린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제 와서 과거 일을 술술 말해서, 뭐? 우리 아가씨의 동정심이라도 자극하려고? 괜한 짓이니까, 그런 건 꿈에도 꾸지 마라.”
세나는 올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했다. 카루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딱히 시스와 올가가 안쓰럽고 불쌍해 죽겠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후우. 올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왜 말하고 싶은 거냐고.”
“당연히, 영애께서는 제 왕의 곁에 서실 분이니, 제 왕에 대해 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 바로 본색이 나오는군. 꿈 깨라고 했지.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
세나가 비죽, 웃어 보였다.
“그렇습니까? 꽤 쉬운 장애물이군요.”
올가의 보랏빛 눈 역시 반뜩였다. 그렇게 철없는 늑대와 손발이 묶인 사막의 전사가 입씨름을 할 새, 카루나는 토굴 구석에 웅크려 앉아 눈을 감았다.
빛 한 점, 바람 한 줄기 들지 않는 곳에 숨어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다. 남의 주머니를 소매치기해 그날 먹을 빵과 물을 사면서도, 토굴에 웅크려 잠을 청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늘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언제쯤이면 국경 경비가 느슨해질까?’
‘시스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까?’
‘황태자와 철십자 기사단은 무얼 하고 있지?’
‘최초의 숲과 맞닿은 서쪽 국경 쪽으로 가 보면 어떨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까?’
그러다 보면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생각까지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라안은?’
라크안을 떠올리자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우리 아가씨는 라안 님의 약혼녀야! 네놈들, 물지렁이 무리의 왕비 따위는 되지 않을 거다.”
“글쎄, 그 물지렁이의 땅에서 오도 가도 못 하고 있는 상태 아닌가? 그 잘난 늑대 동료들은 언제 쳐들어오지? 내 왕에게서 영애를 빼앗아 갈 수 있을 것 같은가?”
세나와 올가의 말다툼이 치열해졌다. 카루나는 둘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 말고 피식, 웃어 보였다. 시스를 떠올리면 드는 생각은, 어떻게 하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뿐이었다.
라크안을 향한 애틋한 마음의 손톱만큼도 시스에게 가지 않았다. 그러니 올가는 세나의 말대로 괜한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다시 올가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 사람을 구해서 함께 제국으로 돌아간다. 그게 내 목표야, 절대 잊으면 안 돼.’
올가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그걸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해지니까.
카루나는 토굴 속에서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지금은 비록 창문 하나 없는 굴속에 숨어 웅크리고 있지마는. 곧 환한 햇빛 아래에서 당당히 어깨를 펴고, 라크안을 껴안으리라.
어둠 속에서 녹색 눈이 반짝, 빛났다. 슬그머니, 발치에서 가느다란 새싹이 돋아 카루나를 간지럽혔다. 카루나는 피식, 웃으며 손끝으로 그 여린 잎사귀를 어루만졌다. 세나와 한참 투닥거리던 올가는 흘깃,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옅은 보라색 눈 역시 희망을 잃지 않고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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