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준비하면서 가장 고심했던 사항은 《단원풍속화첩》 속의 서당, 씨름, 대장간 그림의 작가로만 김홍도를 인식하고 있는 대중들의 그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대중적 오해와 통념은 사실 바꾸기가 매우 어렵다. 《단원풍속화첩》의 그림들은 신문, 잡지, 방송 등 대중매체뿐 아니라 농산물 광고, 민속 관련 행사를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심지어 민속주점, 한식당, 관광호텔의 내부 장식용 이미지로도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중략) 그 결과 《단원풍속화첩》은 ‘김홍도는 풍속화가’라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을 대중에게 심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김홍도에 대한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고 그의 진정한 모습을 알리기 위해 쓰였다. --- p.6
《단원풍속화첩》은 일반 대중에게 김홍도를 한국적인 풍속화의 대가로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또한 이 화첩의 지나친 대중성은 김홍도가 이룩한 화가로서의 업적을 한국적 풍속화라는 범주 안에 가두어버리는 부정적인 역할도 하였다. 즉, 《단원풍속화첩》은 김홍도에 대한 대중적 오해의 근원이기도 했다. (중략) 김홍도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 연구의 주류적 시각인 ‘가장 조선(한국)적인 화가’라는 인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먼저 김홍도의 생애를 보다 객관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 p.13~15
단원이라는 호와 관련해서 강세황은 명백하게 「단원기우일본」에서 김홍도가 명나라 말기의 문인인 이유방(李流芳, 1575~1629)의 인품을 사모해 그의 호인 단원을 따랐다고 했다. 즉, 단원은 안산의 지명과 관련된 호가 아니다. 단구는 도교적 인 호로 ‘신선이 사는 곳’을 의미한다. 단구 또한 안산의 지명
과는 그 어떤 연관성도 없다. --- p.33~34
이용휴도 김홍도의 정교한 묘사력과 화려한 채색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는 “김군 사능은 스승이 없이도 지혜로써 새로운 뜻을 창출하고, 그 붓이 간 곳에는 신이 모두 함께 하니 그 푸른빛, 황금빛으로 섬세하게 그린 터럭이나 붉은색, 흰색으로 묘사한 비단은 모두 정교(精巧), 묘려(妙麗)하여 옛사람이 보지 못함이 나의 한이다”라고 김홍도의 뛰어난 그림 솜씨를 극찬했다. (중략) 정교와 묘려는 모두 김홍도가 정교하고 치밀한 묘사력과 뛰어난 채색 능력을 지닌 걸출한 화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 p.52
당시 김홍도는 29세에 불과한 청년 화가였다는 사실이다. 주관화사였던 변상벽은 40대 후반이었으며 수종화사들인 김후신, 진응복, 신한평, 김관신 모두 40대~50대 초반에 해당되는 중견화가들이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김홍도에게 수종화사들인 김후신, 진응복 등은 아버지·삼촌뻘에 해당되는 선배 화가들이었다. 29세였던 김홍도를 보조하는 역할을 연배가 한참 높은 선배들이었던 신한평 등이 맡았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중략) 김홍도에게는 모두 아버지·삼촌뻘에 해당되는 선배 화가들이 김홍도를 돕는 수종화가였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1773년 당시 도화서 내에서 김홍도가 차지하고 있던 위상을 살펴볼 수 있다. --- p.75~76
김홍도는 병풍화의 대가였다. 따라서 《단원풍속화첩》을 근거로 김홍도를 풍속화의 거장으로 평가한 것은 그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왔다. 김홍도가 남긴 대부분의 명작은 모두 병풍화이다. 그는 병풍화를 통해 새로운 회화적 실험을 감행하였다. 그가 남긴 신선도, 풍속도, 금강산도, 평생도, 책거리 그림, 수렵도는 19세기 병풍화의 모델이 되었던 선구적 작품들이다. --- p.84
《군선도》는 개인의 주문을 받아 김홍도가 제작한 그림이다. 따라서 《군선도》를 그릴 때 김홍도는 정묘한 화풍 구사와 같은 도화서의 규칙을 따를 의무가 없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자신이 원하는 화풍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가 도화서 화원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개성적인 화법을 사용해 그린 최초의 회심의 역작이 바로 《군선도》이다. 이 그림을 통해 김홍도는 다양한 회화적 실험을 감행했다. --- p.104
정조의 김홍도에 대한 신뢰는 남달랐다. 1783년(정조 7)에 정조는 자비대령화원 제도를 신설하고 인사고과 시험인 녹취재를 정기적으로 시행했다. 그러나 김홍도는 초대 자비대령화원에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녹취재 시험을 볼 필요가 없었다. 김홍도는 정조의 재위 기간 내내 녹취재 시험에서 면제되었다. 그는 정조로부터 다른 도화서 화원과는 완전히 다른 매우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김홍도는 정조가 즉위한 이후 줄곧 ‘왕의 화가’로서 특별한 위치에 있었으며, 1783년 무렵에는 도화서 내에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국중 최고의 화가로 성장했다. --- p.196~196
김홍도가 강렬한 문인 취향을 가진 인물이라는 사실은 그가 청년기에 주로 사용했던 자(字)인 사능(士能)에서도 엿볼 수 있다. 사능의 정확한 뜻은 현재 알기 어렵다. 사능의 ‘사’는 독서인, 사대부, 문인을 지칭한다. 사능의 ‘능’은 능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글자 그대로 ‘유능한 사대부’라는 뜻이 될 수 있다. 또는 사능을 ‘물질적인 것에 좌우되지 않고 변함없이 올곧게 처신하는 사대부’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한편 사능 중 ‘사’와 ‘능’은 서로 상반되는 의미일 수 있다. 사능 중 ‘사’는 문인, 사대부를 뜻하지만 ‘능’은 능력, 재주를 의미하기 때문에 기술직 중인을 지칭할 수 있다. 즉, 사능은 중인이지만 사대부를 지향하는 인물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어쨌든 김홍도의 자인 사능의 ‘사’에서 그가 지니고 있던 사대부적 취향을 살펴볼 수 있다. --- p.354
김홍도와 관련해서 주목해 보아야 할 사항은 1776년경 건륭화원을 대표하는 당시 최고의 궁정화가였던 서양이 사라지면서 중국 회화가 암흑기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1776년 조선에서는 정조가 새로운 왕이 되었다. 정조가 등극하면서 김홍도는 도화서를 대표하는 최고 화가로 급성장했다. 1776년에 그는 32세였다. 이해에 김홍도는 《군선도》를 그리면서 병풍화의 대가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건륭화원을 대표했던 서양의 퇴장과 정조 시대 도화서를 대표했던 김홍도의 등장이 1776년 전후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1776년은 두 화가의 운명을 가른 해였다. 서양은 저녁노을을 남기며 쓸쓸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저무는 해’였다. 반면 김홍도는 새벽의 어둠을 가르고 세상을 빛의 세계로 만들며 등장하는 ‘떠오르는 해’였다.
--- p.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