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세 갈래 방법으로 팽창했다. 첫째, 주(周) 이후 역대 왕조가 유력한 제후를 변경에 분봉하여 이민족을 정복하게 했다. 지배민족인 한족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수적으로는 다수이나 경제·문화적 조건이 열악한 주변 민족이 한족에 동화되었다. 산둥성 동부의 제(齊)가 황해 연안 래이(萊夷), 허베이성 북부의 연(燕)이 원시 선비족 일부를 흡수하고, 산시성의 진(晉)이 적족(狄族)을 흡수한 것이 이 같은 경우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루마니아(다키아) 등을 라틴화한 로마인, 중동과 북아프리카 대부분을 아랍화한 메카-메디나 아랍족의 팽창도 한족과 팽창 방법이 유사하다. 둘째, 진(秦)이나 초(楚), 오(吳)와 같은 웨이수(渭水) 상류, 창장(長江) 유역 토착세력이 스스로 한족화 했다. 셋째, 진(晉)이나 연과 같이 문화적으로 우월한 한족이 원시 선비나 원시 터키, 티베트-버마 계열 등 이민족과 섞여 살면서 이들을 동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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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과 비슷한 시대를 산 인물 중 당나라 장군 울지경덕(蔚遲敬德·Yuchi Jingde)이 있다. 조금 앞선 북위(北魏) 시대에는 물길(勿吉) 사신 을력지(乙力支·Yilizhi)가, 북주 시대에는 울지형(蔚遲逈·Yuchi Jiong)이라는 인물도 있다. 수 문제 양견의 우문씨 황족 숙청에서 살아남은 울지형 일가 일부가 고구려로 망명하여 을지씨가 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새외민족의 성은 한자로 음차(音借)해 표기한다. 울지씨는 선비족으로 알려져 있다. 을지씨는 어느 민족일까? 『삼국사기』에 ‘가족 배경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적힌 을지문덕은 어느 종족 출신일까. 아무르(헤이룽)강-우수리강 유역에 ‘울치(Ulchi)’라는, 우리와 유전적으로 가깝고 곰을 토템으로 하는 퉁구스계 종족이 살고 있다. 을력지는 물길, 즉 울치족과 같은 퉁구스계로 보인다. 그러면 을지문덕은 선비계일까 퉁구스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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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일본은 영국-미국 간 관계처럼 백제를 세운 부여계가 일본열도 왜(倭)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가 5세기 말 웅진·사비 시대를 전후하여 일본이 백제보다 더 강대해져 거꾸로 일본이 백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영토가 한반도에만 있었다는 설에 따를 경우 사비시대 기준 백제 영토는 3~4만㎢, 왜(大倭·야마토) 영토는 24만㎢ 정도로 추산된다. 이에 따라 인구수도 백제가 당시 일본의 1/4~1/5에 불과했을 것이다. 경제력과 군사력도 대체로 이에 비례했을 것이다. 한성시대 아신왕, 전지왕과 웅진시대 동성왕, 무령왕은 왜(야마토)에 거주하다가 왜병과 함께 귀국하여 왕으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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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지배기 고려의 왕은 제후왕으로 전락하여 조(祖), 종(宗)을 붙여서 묘호(廟號)를 지을 수 없었다.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으로 ‘충렬왕’ ‘충선왕’ ‘충혜왕’처럼 왕호에 ‘충(忠)’을 덧붙였다. 원종의 아들 충렬왕 이후 고려왕들은 원나라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이했으며, 원칙적으로 정비에게서 난 아들을 왕세자로 봉했다. 고려왕들은 세자 시절 원나라 수도 대도(베이징)에서 인질로 체류하다가 즉위했다. 몽골 혼혈의 고려왕들은 몽골식 이름을 갖고, 몽골식 변발에다 주로 몽골어를 사용했다. 충렬왕의 아들 이지리부카(충선왕) 등은 원나라 내부 권력투쟁에도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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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장 겸 다루가치 울루스부카(이자춘)를 계승한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투를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보냈지만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명장이었다. 이성계는 빛나는 군사 실적을 기반으로 고려 최고의 실력자로 우뚝 섰다. 이성계 군단은 평지전과 산악전 모두에 능숙했다. 오늘날 옌볜조선족자치주 포함 두만강 유역 출신 여진족 위주로 구성된 이성계 군단이 다른 고려 군단에 비해 강력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성계는 신흥 사대부의 대표 격인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의 지지를 받아 조선을 건국했다. 즉 조선은 원나라 지방군벌과 고려 성리학자의 합작품이었다. 조선 건국은 고려의 부패한 친원(親元) 기득권 세력을 밀어냈다는 의미와 함께 성리학이라는 한족 문명을 절대시하는 나약하고 폐쇄된 나라로 가는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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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명은 기본적으로 농경 문명이고, 수용적(受容的)이며, 내향적(內向的)이다. 한족이 거란(요)과 탕구트(서하), 여진(금) 등에 의해 굴복을 강요당한 남송(南宋) 시기에 탄생한 성리학(주자학)은, 몽골 지배기를 거쳐 한족 국수주의적이던 명나라 시대에 크게 발전했다. 성리학은 한족 민족주의적이자 반동적(反動的) 성격을 띠고 있다. 이이, 김장생, 송시열, 권상하, 이항로, 최익현 등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성리학 사대부들은 성리학적 명나라 중심 국제질서에 맹목적으로 동조했다. ‘황허(黃河)는 일만 번을 굽이쳐도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의 ‘만절필동(萬折必東)’으로 상징되는 조선 지배층의 명나라 맹종에 따라 자주의식은 사라졌다. 결국 이는 개화에 성공한 일본의 조선 병탄으로 이어졌다. 조선 사대부 지배층은 ‘그 어떤 민족도 교조적 원리에 묶여 있다면 진보할 수 없고, 생명력을 잃어 결국 사라지고 만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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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몽이 이끌던 졸본부여인(Chorbon扶餘人) 수천 명이 대제국 수·당에 맞선 강국 고구려를 세웠다. 인구 100여 만에 불과한 칭기즈칸의 몽골이 유라시아를 제패했다. 인구 10여 만에 불과했던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이 만주를 통합하고 거대한 명나라를 쓰러뜨렸다. 아시아의 변방 섬나라 일본이 20세기 초 동아시아 대륙과 서태평양 거의 대부분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세웠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과 같이 “미래에 대한 비전 없이 현상유지에만 집착하며, 스스로 강해지려 하지 않는 나라에게 밝은 미래는 주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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