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이라는 용어는 19세기에 들어서야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이 용어가 무지, 미개와 연관된 것은 18세기 말이다. 아시아, 북아프리카, 동유럽인들에게 전염병의 도래는 끔찍한 현실로 남아 있었다.
--- p.35
1347년, 유구한 비잔틴제국의 수도에 페스트가 창궐했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감염된 채로 탈출했다. 그들 가운데는 카파를 벗어난 제노바 상인들도 있었다. (…) 처음 그들이 발을 들여놓은 곳은 시칠리섬 메시나 항구였다. (…) 이곳이 1347년 10월 페스트의 발생 기록이 남아 있는 최초의 도시이다.
--- p.44
페스트균을 지닌 쥐벼룩이 옷감, 곡물, 다른 산물들에 끼어 중앙아시아로부터 멀리 크리미아까지 이동했다. 그곳에서 다시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유럽으로 향하는 상선들을 통해 쥐에게로 옮겨졌다. 마침내, 레반트와 이집트가 자연스럽게 페스트의 ‘온상’으로 간주되었다.
--- p.46
1348년 피스토야 칙령Ordinances of Pistoia까지 소급해 올라가는 이런 조치들은 감염된 지역의 사람들과 리넨이나 모직 천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의 접근을 금지했다. (…) 예컨대, 베네치아에서는 1348년에 위생위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위원회는 감염된 선박, 상품, 선원들을 항구 외곽 석호潟湖에 가둘 수 있는 권한을 행사했다.
--- p.51
위생상의 이유로 배를 묶어 두는 것은 ‘격리quarantine’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이 말은 1397년 (아드리아해 연안 도시) 라구사Ragusa 공화국이 마련한 여러 규제 조치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그해에 이 도시는 기존의 1377년 예방 조치를 확대해 40일까지 선박을 격리할 수 있도록 했다.
--- p.52
격리 관행은 황열병이 처음 보고된 17세기 말부터 서인도에서 유럽으로 항해하는 선박들에 때때로 시행되었다. (…) 최초의 사례는 1647년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에서 등장했는데, 바베이도스에서 이곳에 도착한 선박들에 시행되었다.
--- p.72
네덜란드인들은 암스테르담에서의 전염성 질병에 대한 소문을 근거로 영국이 부과한 30일간의 격리 조치에 반대했다. (네덜란드가 조심스럽게 페스트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던) 이 질병은 분명히 가라앉았으며, 네덜란드 정부는 두 나라의 “중단 없는 상업”이 서로 이익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 p.85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지금도 가끔 역병에 시달리던 오스만제국의 지방 속주 몰다비아Moldavia와 왈라키아Wallachia의 국경을 따라 1,600킬로미터(1,000마일)의 방역선을 유지했다. 그 국경에 감시탑을 세우고 격리 조치를 받지 않고 국경을 넘는 사람을 보면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은 초병들이 정기적으로 순찰했다.
--- p.103
격리 제도의 발달도 금전적 동기에서 비롯됐다. 1781년까지 리보르노에는 제노바의 격리 시설 증설에 대응하여 제3의 검역소lazaretto가 건설되었다. 두 항구 모두 지중해를 거쳐 서쪽으로 항해 중에 어느 지점에선가 격리를 받아야 하는 상선들로부터 수입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p.115
찰스 콜드웰Charles Caldwell은 격리 조치란 ‘이성과 과학보다는 미신과 편견에 바탕을 둔중세적 제도’라고 비난했다. (…) 콜드웰은 인간 정신이 ‘사제의 기만적인 속임수’에 의해 타락하고 교황의 심각한 폭정 아래 신음하던 때에 격리 조치가 도입되었다고 주장했다.
--- p.138
1851년의 파리회의가 구속력 있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개최 사실 자체는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전 세기에는 격리 조치를 외교정책의 수단으로 광범위하게 남용했다. 1820년대 말 부르봉 정부는 에스파냐에서 자유주의적인 움직임을 분쇄하기 위해 방역선을 이용했다.
--- p.171
에클레어호와 보아비스타에서의 발병은 지역적인 관심 이상의 것이었다. 이것은 주요 전염병이 증기선의 이동으로 퍼진 최초의 사례였고, 서아프리카와 서인도제도로부터 유럽으로 황열병이 급속하게 퍼질 것이라는 우려는 격리 조치의 완화 또는 폐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숙제가 되었다.
--- p.184
에클레어호는 9월 28일 영국의 포츠머스Portsmouth에 도착했다. 승무원 가운데 (버나드를 포함해) 90명 이상이 열병을 앓았으며, 사망자만 45명이었다. 이 해군 함정은 (…) 어느 병원에도 환자들을 상륙시킬 수 없었다. 그 대신 1825년 격리법에 따른 권고 기간인 21일 동안 격리 조치를 당해 모든 선원들은 선상에 있어야 했다. 이 격리 기간에 더 많은 선원이 감염되었고 이미 병에 걸린 사람들은 상태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 p.188
1878년 5월, 뉴올리언스에서 황열병이 보고되었는데 (…) 빠르게 미시시피강 계곡으로 퍼져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테네시주를 황폐화시켰다. 1878년 10월에 전염병이 가라앉았을 때까지 2만 명 이상이 죽었다. 이는 1850년대 이후 미국에서 최초로 심각한 황열병 창궐이었고, 순전히 사망자의 숫자로만 보면, 미국 역사상 최악의 사례였다.
--- p.249
1902년 회의에서는 세계 최초로 영구적인 국제위생기구인 범汎미주보건국Pan American Bureau of Health을 설립했는데, 그 주된 목적은 남·북미 국가들의 질병 및 위생규정에 관한 정보를 개선하는 데 있었다.
--- p.270
1865년 전 세계는 메카Mecca에 모인 순례자들 사이에 콜레라가 발생해 약 3만 명―메카 순례자의 거의 3분의 1―이 죽었다. 광대한 영토에 인구가 널리 흩어져 있는 러시아에서는 약 9만 명이 병에 걸려 죽었고, 북아메리카에서는 그 전염병이 대부분 항구를 엄습해 사망자는 거의 5만 명에 가까웠다. 프로이센과 전쟁에 휘말린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병사자는 16만 5천 명을 넘었다.
--- p.285
1865년 메카에서의 콜레라 발병은 아라비아에서 서쪽으로 더 멀리까지 은밀하고 급속하게 확산될 가능성 때문에 더 큰 우려를 낳았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1850년대 초 이래 열리지 않던 국제위생회의를 다시 소집한 것은 바로 이 두려움 때문이었다.
--- p.288
어떤 정부도 홍콩과 뭄바이 같은 거대 항구 도시를 굴복시킨 수입 금지 조치와 위생 규제를 당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따라서 파리에서 각국 대표들은 최신의 과학적 견해와 국제 무역의 필요성을 고려해 페스트와 다른 전염병에 대한 통제를 이끌어 내려고 노력했다. 이 회의에서 서명한 협약은 국제 보건 규제의 선구라 할 수 있는데, 1907년 4월 로마에서 비준되었다.
--- p.375
아바나 위생회의에서 성안된 1924년 범미주위생협약Pan American Sanitary Code은 통계와 위생 조치를 표준화하여 “국제 상업에 불필요한 간섭”을 줄이려는 여러 시도 중의 하나였다. 그 협약은 서명국들이 페스트, 콜레라, 황열병, 천연두, 발진티푸스 등의 발병 즉시 범미주위생국Pan American Sanitary Bureau에 통보하는 것은 물론, 이 질병을 막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 p.392
감염된 소 떼를 대상으로 대량 도살을 허용한 1866년 가축질병법Cattle Disease Act은 지방 당국에 폐렴과 구제역을 포함한 동물의 모든 질병에 대한 권한을 부여한 몇몇 법률 중 최초의 것이다.
--- p.414
독일의 수입 금지는 미국의 보복을 유발했고 ‘돈육 전쟁Pork War’으로 알려진 10년간의 무역 분쟁을 촉발했다. 유럽 국가들 간의 관세 전쟁은 드물지 않았고 심지어 전통적인 자유무역 챔피언인 영국에서도 농업 부문이 값싼 외국 수입 농산물의 영향을 실감하면서 갈수록 보호와‘제국 특혜관세imperial preference’를 외치는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 p.424
미국의 위생정책과 국제가축전염병기구 가입 거부는 외국과의 경쟁에서 목축업자와 육류 생산자들을 보호하려는 것이었고 이 원칙은 향후 수십 년간 유지되었다.
--- p.428
세계동물보건기구WOAH, 이 새로운 기구는 가난한 나라들에게 불공정한 영향을 미친다고 인정되는 위생 규제의 폐해를 제거하는 일에 헌신했다. WOAH가 분명히 언급했듯이, “소비 감소와 함께 정당화되지 않은 무역 붕괴는 소득 자원을 잃은 전 세계 소규모 농부들과 생산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 p.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