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겪는 감정 앞에서는 누구나 당황하기 마련. 파리에서 외로움을 마주한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타국에서 온 나는 외로움을 토로하고 위로받을 지인이 많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외로움이란 가까운 사람일수록 오히려 드러내기 어려운 감정이다. 누구에게나 ‘나만 아는 외로움’이 있는 이유다.
다만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므로 곧 자신의 감정을 직시하고, 상황에 적응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물건을 사거나, 먹고 마시는 데 탐닉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친구를 사귀거나. 모두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들이다. 물론 모두 도움이 된다. 내 경우 의외로 효과가 없었던 건 읽기, 의외로 도움이 되었던 건 쓰기였다. 외로움에는 타인의 유려한 글보다 나의 서툰 글이 더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이때 알았다.
---「프롤로그」중에서
직장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공간이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기분은,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외로움이다. 정직원과 ‘심리적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앉은 인턴은 외롭다. 취준생과 회사원의 경계에 있는 신입사원은 외롭다. 이제 회사에 적응했나 싶었는데 슬럼프에 빠져버린 대리는 외롭다. 이대로 평생 부장처럼 살아야 하나 비관하는 과장도 외롭다. 이제는 패기 있게 사표를 쓸 수 없는 부장도 외롭다. 드라마 〈미생〉처럼 아름다운 장면이 존재하지 않는 걸 깨닫게 된 모든 직장인은 외롭다.
#스토브리그
종종 사람들에게 묻는다. “외로움이 뭐라고 생각해요?”
이때 사람들의 대답이 재미있다. 외로움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대신 자신이 언제 외로운지 말한다. 사랑이 뭐냐고 물었을 때와는 반응이 사뭇 다르다. 외로움을 정의하기 어려운 이유는 같은 외로움이라도 상황에 따라 색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외로움이라는 ‘상황’을 관찰하기 시작한 것도, 외로움을 외롭다고만 느끼지 않게 된 것도 이것을 알게 되고서다.
#다자키쓰쿠루
소울푸드가 뭐예요?” 미식의 도시 파리에 살아서인지 종종 듣는 질문이다. 라따뚜이? 꼬꼬뱅? 부야베스? 상대는 내심 프랑스 전통음식들을 기대하고 물었을 텐데 난 늘 머뭇거리다 결국 명확한 답을 하지 못한다. 심금을 울릴 만큼 애착이 가는 음식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맛있으면 다행이고 맛없으면 서글퍼지며,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맛있는 음식도 달라진다.
생각해보건대 라비올리 역시 나의 소울푸드는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대변해주는 음식도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파리에 대해 이야기해보라면, 파리에서 느꼈을 외로움에 대해 묻는다면, 라비올리로 이야기를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처음으로 나만의 라비올리를 만들고 신기했던 기억, 어정쩡한 위치에서 더욱더 크게 느꼈을 소외감을 덜어준 레시피의 분투, 친구들과의 맛집투어를 대신해준 든든한 간식. 라비올리는 외로웠다면 외로웠을 나의 식탁을, 어쩌면 마음을 풍성하게 채워준 존재감 있는 친구다. 그게 소울푸드라면 소울푸드겠지만.
---「라비올리 한 접시」중에서
외로움에 대해 쓰면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느끼기 쉬운 만큼, 글을 씀으로써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알아가는 것만큼이나 흥미로운 일이다. 그동안 내가 별 뜻 없이 해온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내가 무얼 할 때 가장 신나는(!) 사람인지 알게 된다.
나는 기본적으로 먹고 마시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다. 특히 쓰는 행위와 마시는 행위는 분리될 수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글을 쓰며 무언가 마시는 걸 즐겼다. 집에서 거리가 있는 카페까지 굳이 걸어가 원두를 사와 커피를 내리고, 실력 좋은 바텐더의 바에 일부러 찾아가 칵테일을 맛보고, 이왕이면 구하기 어려운 맥주를 찾아 마셔보는 것. 모두 쓰는 행위가 가져다 준 취미다.
---「파리의 와인가게」중에서
파리 사람들도 나처럼 카페에서는 덜 외로워지기 때문일까.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파리의 카페에서는 비교적 차가운 파리 사람들의 따뜻한 면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를테면 카페를 나서는 길에 커피나 빵을 하나씩 더 사가는 이들이 종종 있다. 파리에는 노숙자가 많은데 빵 하나, 커피 한잔을 더 사서 이들에게 슬며시 쥐여주는 것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돈을 주면 술이나 담배, 마약을 살 수도 있다는 염려가 깃든 사려 깊은 행동이다. 언젠가 나도 해봐야지, 하게 되는 시크한 배려랄까.
카페의 무엇이 파리 사람들을 따뜻하게 만드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파리를 떠날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커피의 따뜻한(여전히 대부분의 파리 사람들에게 커피는 차갑게 마시는 음료가 아니다) 속성이 마음의 온도를 높여주는 건 아닐까 추측해볼 따름이다.
서울에서 나는 친구를 만나는 대신 카페에 앉아 조용히 노트북을 켠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많지는 않지만 카톡을 보내면 즉각 답을 보내주는 친구가 파리에 한 명, 팔로알토에 한 명, 서울에 한 명 있다. 셋이 각기 다른 시간대를 사는 덕분에 나는 이들 중 누군가와 늘 연결되어 있다. 누군가와 물리적으로 연결되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건 누군가와 끊김 없이 이어져 있다는 것 아닐까?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영광은 내 인생에 찾아오지 않을지 몰라도, 카톡이 멈추지 않는 나의 삶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대단히 흡족하다. 외로운 파리에서 터득한 삶의 요령이다
---「카페의 온도」중에서
“외로움에 대해 쓴다고?”, “외로움을 글로 쓸 수 있을까?”
외로움에 대한 책을 낸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모두 비슷했다. 나 역시 처음에는 마찬가지였다. 외로움은 다른 이들에게 선뜻 말하기 망설여지는 감정인 데다, 외로움처럼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감정을 온전히 글로 풀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나라는 사람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꽤 이성적인 편이다. 평소 일상을 관찰하고 거기서 느끼는 것들을 연결해 나만의 관점을 만들어가는 글쓰기는 즐기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로서는 모험에 가까운 시도였다. 그것도 외로움이라는 낯선 주제로.
그런 내가 이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디지털, 그러니까 온라인이라는 존재 덕분이었다. 온라인은 오프라인과 또 다른 세상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완전히 떼어놓을 수는 없지만, 분명 온라인에서만 할 수 있는 이야기, 온라인에서만 튀어나오는 감정이 있다. 때로는 얼굴을 맞대고 말하는 것보다 메신저로 대화할 때 오히려 속내를 털어놓기 편한 것처럼, 온라인이어서 내려놓을 수 있는 순간이 있다. 무언가를 ‘쓴다’는 행위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속성을 띠는데도, 스마트폰으로 매 순간 스쳐 지나가는 감정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에필로그」중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갖지 못해 결핍을 느끼지만, 마음 둘 곳이 없을 때에도 결핍을 느낀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다 일어나기만 해도 마음이 채워지는 곳이 있다면 어떨까? 말하지 않아도 내 고민을 알아주는 곳이 있다면 어떨까? 영화 [카모메 식당]에도 그러한 장면이 나온다.
“여기 사람들은 왜 이렇게 여유로워 보일까요?”라고 혼잣말을 하는 마사코에게 핀란드인 토미가 말한다. “숲이에요, 여기엔 숲이 있거든요”라고. 마사코는 그 말을 듣자마자 숲으로 향한다. 숲에 간 그녀는 버섯을 따다 말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한참 바라본다.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가 사는 도시에도 그 숲처럼 아무런 목적 없이 찾아갈 수 있는 공간이 생기길 상상했다. 굳이 구체적인 조건을 달아야 한다면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내 이야기’를 쓸(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쓰면서 나를 더 알아가는 곳이면 좋겠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밝히지 않고 나에 대해 쓸 수 있는 곳, 가끔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을 표현할 수 있는 곳이어도 좋겠다. 온라인이어도 좋고 오프라인이어도 좋다. 지금도 이따금 카모메 식당에 가고 싶은 이유다.
---「카모메 식당」중에서